추천관광지

전국의 기묘한 장소

햇과 2019. 12. 23. 10:07




여러 이유로 낯설고도 흥미로운 인상을 남기며, 그 자체로 여행의 이유가 되는 기묘한 장소 9곳을 소개한다.

충청남도 당진 왜목마을

왜목마을의 일출. © 이기선© 제공: 론리플래닛 매거진 왜목마을의 일출. © 이기선

당진시에서도 차로 30분 더 들어가야 하는 왜목마을 앞에는 꼭 ‘해 뜨고 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낚시꾼을 빼면 사람들이 이 외진 땅 끄트머리에 가는 이유는 딱 하나, 서해안의 일출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목격하기 위해서다. 북쪽으로 돌출된 지형 탓에 벌어지는 당연한 자연현상인 걸 알아도 여전히 신기하다. 이를테면 ‘신비의바닷길’이나 ‘도깨비도로’ 처럼. 인간은 늘 기적을 믿고 싶은 존재라, 때로는 기적의 착시 현상에 일부러 속는 건지도 모른다.

비치타운모텔에 예약 전화를 하자 주인장은 대번 바다 전망 방의 가격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왜목마을을 상징하는 고전적인 일출 사진(노적봉 위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 아래 ‘왜목마을’이라 쓰인 조악한 아치형 조형물을 통과했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썬라이즈’ ‘해돋이’ ‘비치’ 같은 이름을 붙인 숙박 시설이 해변 앞에 모여 있는 정도다. 1층에 횟집을 운영하고 하루짜리 손님이 드나드는 숙소들. 지름 139만 킬로미터의 펄펄 끓는 항성이 이들을 불러 모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해상 조형물인 새빛왜목은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은빛으로 번쩍였다. 이 해수욕장에서는 일몰이 보이지 않아 마을 뒷동산 격인 석문산에 올랐다. 동쪽 바닷가 위로 송편 같은 달이 떠올랐고, 반대편 들판 너머로는 이 여행의 목적인 거대한 항성이 최후의 빛을 뿜으며 가라앉았다.

이튿날 동이 트기 전에 컴컴한 해변으로 나가자 이미 몇몇 동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붉어오는 수평선을 보며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 ‘서해안의 일출’이라는, 통념을 거스르는 일이 벌어질 참이었다. 미리 확인한 일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영 보일 기미가 없기에 긴장을 놓은 찰나, 국화도의 낮은 실루엣 위로 새빨간 빛 덩어리가 빼꼼 나타났다. 일출에 놀라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거무스름한 펄 너머로 그 빛 덩어리가 상승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목표를 달성한 사진 동호회 사람들은 일출을 배경으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더니, 후다닥 차에 올라타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날 아침엔 해변 앞 편의점 직원도, 택시기사도 안부를 건네듯 물었다. “일출 봤어요?”

—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강원도 춘천 육림랜드

육림고개에서 닭갈비를 먹고 차로 10분 달리면 의암호에 면한 육림랜드에 도착한다. ‘육림’이라는 간판을 단 녹슨 관람차가 멈춰 서 있는 모습이 인근 도로에서부터 보이는데, 이는 오늘의 육림랜드를 그대로 보여주는 간판에 가깝다. 1975년 개장한 이 테마파크는 레트로 유행과 폐허 포르노의 맥락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 이를테면 폐장한 뒤 오히려 출사지로 명성을 얻은 용마랜드와 달리 이곳은 뚜렷한 방향성 없이, 노후해가는 시설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평일 오후의 육림랜드는 당황스러울 만큼 썰렁했다. 이곳에서 촬영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장면을 담은 플래카드와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손님이라고는 두 아이를 데려온 젊은 엄마뿐이었고, 몇 안 되는 놀이기구 중 다수가 어린이용이었다. 안쪽 매표소에서 타고 싶은 놀이기구 표를 산 다음, 놀이기구 앞에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매표소 직원이 와서 기구를 작동시켜주었다. 작은 동물원과 체험 농장도 있다고 들었으나 부러 확인하지는 않았다. 종말 후 놀이공원을 독점하는 기분, 회전목마에서 가장 멋진 말을 고르는 특권 정도면 충분했다.

—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서울 용산구 토키바야마

토키바야마의 잔코나베. © 타드 샘플© 제공: 론리플래닛 매거진 토키바야마의 잔코나베. © 타드 샘플 토키바야마의 주인장. © 타드 샘플© 제공: 론리플래닛 매거진 토키바야마의 주인장. © 타드 샘플

어릴 적 잡지에서 처음 접한 스모 선수의 사진은 내게 유독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제까지 봐온 스포츠 선수의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10여 년 후 TV에서 스모 대회를 우연히 보면서 나는 오랜 전통을 지닌 이 스포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모 선수가 단순히 많이 먹는 게 아니라는 것과 어떻게 몸을 만드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스모 선수는 하루에 두 끼만 먹지만, 놀랍게도 하루 총 섭취 열량은 4,000~1만 칼로리라고 한다. 시즌 없이 2달마다 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그들은 늘 음식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지켜야 한다. 스모와 가장 연관성이 깊은 요리가 바로 잔코나베다. 스모 선수의 덩치를 생각하면 자칫 살잘 찌는 음식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스모 선수는 식사량을 늘려 몸을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메뉴는 건강한 음식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매일 먹는 잔코나베는 다양한 종류의 채소(주로 복초이, 무, 버섯)와 닭고기, 생선, 미트볼, 두부를 다시마 국물에 넣고 끓이는 푸짐한 스튜다.

스모 양성소에는 후배가 선배의 식사를 책임지며 하루 2끼를 정성껏 준비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스모 선수 중에는 은퇴 후 선수 예명으로 이름을 지은 잔코나베 식당을 여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이태원 토키바야마의 오너 셰프인 하루키 요시하루 역시 일본에서 대를 이어 스모 선수로 활동한 후 가게를 차렸다. 가게 곳곳에서 스모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이렇듯 음식과 문화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음식은 물론 한 나라와 지역의 문화까지 정통적으로 구현해 선보이는 식당을 경험하는 ‘더 넥스트 레벨(the next level)’ 외식 경험은 앞으로 더욱 대중화되리라 생각한다.

— 잇센틱 대표 타드 샘플(인스타그램 toddsample_eat)

전라북도 순창 야생차나무 군락

지난해 봄, 순창의 한 베이커리에서 진행하는 소셜 다이닝을 취재했다. 차(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참가자가 엉뚱한 제안을 건넸다. “순창에 사는 ‘차 요정’을 한번 만나 보실래요? 워낙 차에 박식해서 지인들은 다들 그렇게 부르죠. 마침 오늘 선생님과 차숲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요정이 진행하는 차 숲 탐방이라…. 다음 일정까지의 시간이 좀 걱정됐지만, 호기심이 동해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강경마을회관 초입. 아궁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검박한 황톳집에서 ‘차 요정’ 박시도 선생을 만났다. 목젖 아래까지 턱수염을 기른 그는 언뜻 도사 같은 면모를 풍겼다. 인사를 나누고 곧장 사륜구동 SUV에 올라타 지도에 나오지 않는 불암산 자락의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며 달렸다. 자동차로 진입할 수 없는 구릉에 이른 뒤에는 낙엽이 수북이 깔린 산길을 따라 걸었다. 유난히 걸음이 날쌘 차 요정을 쫓으며 관목이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파릇하게 잎이 돋아난 차나무 군락이 고아하게 펼쳐졌다.

선운사의 차밭을 관리하기도 한 박시도 선생은 십수 년 전부터 섬진강 일대의 자생 차나무에 관심을 쏟았고, 순창의 차나무 군락을 발견하면서 야생차를 수확하기 시작했다고. “차 숲은 사람의 관리가 전혀 필요 없지요. 씨앗이 떨어져 자연 발아를 하고, 키 큰 관목이 그늘을 만들고, 잡초가 영양분을 고르게 나눠주거든요. 숲의 정령처럼 서로 도와주는 셈이죠.” 그가 실제 야생차를 수확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곤 숲을 어슬렁거리며 덩굴을 제거하는 정도라고. 날이 풀리면 차숲 한쪽에 만든 움막과 화롯대에서 다도를 즐긴다고 한다. “야생차는 밭에서 기른 재생차보다 씁쓸한 맛이 훨씬 강해요.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쓴맛으로 차의 깊이를 느낄 수 있죠.” 차 숲 탐방을 마치고 그가 내어준 야생차에선 텁텁하고 알쏭달쏭한 맛이 혀끝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순창의 비밀스러운 차 숲은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정작 기사에 소개하기엔 좀 애매했다.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진행하는 탓에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 그런데 최근 차 요정이 자신의 야생차를 적극 알리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거처에 다문(茶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미리 연락을 준 방문객과 차담을 나눈다고. 비밀의 차 숲과 그가 내린 야생차가 궁금하다면 ‘차 요정’ 박시도 선생에게 전화(010 2860 8607)를 걸어보자.

— 에디터 고현(인스타그램 kohyun23)

경기도 동두천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

지하철 1호선 보산역 1번 출구 앞,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 거리와 지하철역 교각은 스타일이 서로 다른 그라피티로 덮여 있다. 경기도미술관과 동두천시가 2015년부터 진행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계 각국의 작가가 참여한 작품이다. 경기도 내 다른 미군 기지와 마찬가지로 동두천 캠프 케이시의 반환 역시 미뤄지면서 이 지역 경기 침체도 지속되고 있다.

내가 찾은 일요일 오후에도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클럽, 미용실, 양복점, 식당 같은 가게는 모두 영어 간판을 달고 가격을 달러로 표시해두었다. ‘마추픽추’와 ‘타지마할’ 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는가 하면 새로 생긴 카페와 공방도 보였다. 얼핏 오키나와 도심 뒷골목이 떠오르기도 했다. 골목 끝자락까지 가자 동두천시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캠프 케이시의 담이 보였다.

경양식당 오륙하우스 안은 평화로웠다. 미군 장교 식당 출신 요리사가 1969년에 열었고, 롯데호텔 조리부에서 근무하던 그의 아들이 1997년 말 물려받아 지금껏 운영하는 이곳에는 번영했던 과거가 박제되어 있다. 나는 고기 패티와 달걀 프라이, 슬라이스 치즈를 넣은 킹버거와 오륙하우스 정식을 먹었다. 정직한 맛이었다. “모든 소스를 직접 만들고 플레이팅도 세심히 신경 써요.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시절에는 1년간 번 돈으로 집을 샀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음식을 이렇게 제대로 내는 곳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주말에는 여기 거리가 사람으로 꽉 찼고요.” 오춘호 셰프의 부인이 착잡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지역 경제가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믿는다는 그녀의 얼굴은 동두천에서 내가 본 가장 환한 표정이었다.

—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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