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과 2016. 10. 19. 10:05

 

[명산순례기 | 대암산 솔봉] 가을은 단풍보다 먼저 온다


태풍을 애타게 기다릴 만큼, 올여름 더위는 대단했다. ‘전기료 폭탄’은 ‘물 폭탄’조차 사소한 일로 여기게 만들었다. 자비라는 말의 용도에 깜깜한 폭염 앞에서 우리는, (슈퍼컴퓨터를 맹신하기는 했지만)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을 대신 말한 죄밖에 없는 기상청에 화풀이하는 걸로 부채질을 대신했다. 설사 기상청이 정확한 예보를 했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기상청 편을 들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기상청의 무능이 아니라 기후 변화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각성이었다. 기상청이 기능적으로 무책임했다면, 우리 모두는 윤리적으로 무책임했다.

[월간산]솔봉 동동남쪽 조망. 가운데 높은 산이 설악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가리봉(1,519m)이고 왼쪽으로 보이는 안부가 한계령이다. 설악산 대청봉은 왼쪽의 나무에 가렸다.
[월간산]솔봉 동동남쪽 조망. 가운데 높은 산이 설악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가리봉(1,519m)이고 왼쪽으로 보이는 안부가 한계령이다. 설악산 대청봉은 왼쪽의 나무에 가렸다.

추석이 지나고도 산색은 여전히 푸르지만 아침저녁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은 완연한 가을이다. 지긋지긋했던 여름도 벌써 아득하다. 내년 여름 폭염이 반복될 때까지는 사소한 기억으로 봉인될 것이다.

문득 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아진다. 공원 숲길을 걷다가 솜사탕 냄새가 나면, 호흡을 가다듬고 계수나무를 찾게 된다. 먼 산의 구름이 하늘을 파랗게 물들일 때, 고개는 젖혀지고 두 다리는 하늘을 자맥질한다. 강아지풀꽃에 앉은 햇살이 노을빛을 띨 때, 손차양을 내리고 잘 익은 태양과 얼굴을 마주한다. 가을은 단풍보다 먼저 온다.

문득 북쪽의 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굳이 변명 같은 말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결코 가을 산을 일찍 보고 싶은 조급함 때문이 아니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대암산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암산은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산불예방 기간이 아니면 언제나 오를 수 있는 대암산 서남쪽의 솔봉(1,129m)을 택했다. 광치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할 경우 광치계곡으로 솔봉을 오르게 되는데, 초가을 계곡 산행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암산(1,310m)은 강원도 인제군과 양구군에 걸쳐 있다. 민통선 안이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용늪이 생태 탐방 명소로 알려지고, 2015년부터 하루 250명으로 탐방 인원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 되었다. 용늪은 1989년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97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람사조약의 습지로 등록되었다.

성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다. ‘광치계곡’은 용늪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계곡이다.

숲의 풍장(風葬), 가을은 이렇게 온다

[월간산]광치계곡의 옹녀폭포.
[월간산]광치계곡의 옹녀폭포.

광치자연휴양림을 지나 찻길이 다한 곳에서 광치계곡으로 드는 숲길이 시작된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 옆 천막 안에서 마을 주민 두 분이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인사도 할 겸 다가가 보니 송이버섯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뜻밖이었다. 소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 산인데 송이는 어디서 난 것일까. 소나무가 숨어 있다시피 하니까 송이 또한 숨어서 자라기에 좋은지 모르겠다. 송이는 향기만으로도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폐부 가득 가을을 채운다.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쑥부쟁이가 맑게 웃으며 반긴다. 예뻐서 꽃이 아니다. 사나운 얼굴을 할 줄 몰라서 꽃이다. 수풀은 아직도 싱그럽지만 여름날처럼 맹렬하지는 않다. 담대한 초록. 언제든 뿌리로 돌아갈 준비가 된, 일대사를 필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완숙의 초록이다.

계곡 물소리가 귀를 밝힌다. 단단하지만 밝은 소리다. 햇살이 그렇게 조율을 한 것이다. 물소리를 따라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마른 풀 냄새가 물소리의 가락을 탄다. 숲의 풍장(風葬). 가을은 이렇게 온다.

계곡 가에 가래나무 열매가 가득하다. 호두처럼 생겼지만 호두와는 달리 타원형이고 양 끝이 뾰족하다. 그 모양이 농사 도구 가래를 닮았다 하여 가래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전에 어른들은 추자(楸子)라고도 불리는 그것을 손바닥 지압용으로 썼다. 어릴 적, 어른들이 추자 두 알을 손바닥으로 오도독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와 어른 사이의 가늠할 길 없는 ‘거리’를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느 새 내가,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거리에 있던 어른이 되었다(이때의 어른이란 생물학적 의미의 어른을 말한다). 내 안의 아이도 그만큼 멀어졌다. 이 슬픈(?) 현실에 항복하는 의미로 몇 알을 주워서 배낭에 챙긴다.

가래를 줍다 보니까 여기저기에 밤송이가 뒹군다. 아람이 벌어진 것도 있고 떨어져 나온 밤톨도 수두룩하다. 요 며칠 사이에 아무도 이 길을 가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직 단풍철이 아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늪 쪽을 택한다는 걸 짐작케 한다.

[월간산]득도한 나무들. 완숙의 초록.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끝냈다.
[월간산]득도한 나무들. 완숙의 초록.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끝냈다.

밤을 까서 입에 넣다가 다람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도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가증스럽게 착한’ 생각이었다. ‘온 산에 도토리 천지이고 밤도 이렇게 많은데 내가 조금 먹은들…. 이 산의 다람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거야’ 하고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움큼 주워서 배낭에 챙긴다.

광치계곡은 넓지 않다. 협곡도 아니다. ‘원시적 비경’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표현이지만, 원시적 생명력으로 충만한 건 사실이다. 오는 사람 다 안아 주고도 그렇다. 자연이라는 ‘신’이 아직 인간을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광치계곡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미적 척도를 넘어선 데 있다.

곧 바다로 스며들고, 또 얼마 지나 구름과 비 되고 말아

계곡은 한참 동안 경사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누워서 흐른다. 옹녀폭포를 지나면서부터 허리를 들어 올리지만 가파르다 할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올라서 언제 1,129m에 이르는 높이에 이를까 싶을 정도다. 능선에 올라도 경사는 부드럽다. 계곡 초입의 해발고도가 이미 800m 정도라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된다. 솔봉과 광치계곡 원시림의 힘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 아니라 지형적인 후덕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옹녀폭포(예전에는 광치폭포라 불렀다)는 50m 아래의 강쇠바위와 짝하여 사람들의 입길에 오른다. “옹녀와 변강쇠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정분을 나누다가 노한 산신령으로부터 얻어맞고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창작(?)된 전설이다.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 외설성이 문제가 아니라 빈곤한 상상력, 이야기의 상투성이 문제다. 광치계곡은 자연 그 자체로 빛나는 곳이다.

[월간산]1. 작은 흰주름버섯이 언젠가는 죽을 큰 나무를 다 먹어치울 것이다. 모든 생명의 뿌리는 하나다. 2.솔봉 오르는 길 숲바다를 유영한다.
[월간산]1. 작은 흰주름버섯이 언젠가는 죽을 큰 나무를 다 먹어치울 것이다. 모든 생명의 뿌리는 하나다. 2.솔봉 오르는 길 숲바다를 유영한다.

솔봉을 오르는 길은 광치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숲바다를 유영하는 일이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에 올라도 숲은 울창하다. 전형적인 맑은 가을인데도 숲 바닥이 어둑할 정도다. 잠깐 한눈을 팔다가 미끄러진다. 도토리 미끄럼을 타 보기는 처음이다. 어떤 곳은 자갈길을 걷는 기분이다. 

솔봉 정상은 숲이 우거져 조망이 불리하나 전망용 정자가 까치발을 대신해 준다. 서쪽으로는 사명산과 양구군 동면 일대가 눈 아래 펼쳐진다. 북쪽 멀리 금강산이 어렴풋하고 동쪽으로는 설악산 일대가 이웃처럼 다가온다.

산을 나서며 듣는 광치계곡 물소리는 오를 때와 사뭇 다르다. 계류가 수풀에 들려주는 작별의 노래다. 이 물은 겨울이 오기 전 바다로 들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람과 구름과 비가 되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가을은 이렇게 온다.

[월간산]1. 광치계곡 숲길에서 만난 구절초. 2. 광치계곡의 숲길을 밝히는 실새풀. 3. 장하다 메뚜기. 이 여름, 잘도 견뎠다. 4. 광치계곡이 키운 밤.
[월간산]1. 광치계곡 숲길에서 만난 구절초. 2. 광치계곡의 숲길을 밝히는 실새풀. 3. 장하다 메뚜기. 이 여름, 잘도 견뎠다. 4. 광치계곡이 키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