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명산 능선걷기 30선
한강을 굽어보며 아차산 정기를 받는다."
1990년대 초반쯤, 아차산 한강변 신축 아파트의 분양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광고 카피로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아차산에 오르면 대번에 실감이 간다. 아차산(峨嵯山·287m)은 나지막한 높이에 비해 한강을 따라 돌아가는 그 시계(視界)는 거의 300도가 넘을 성싶다. 그만큼 사방팔방 전망이 트여있다. 왜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도 군사적 각축장이자 격전지였는지 알 수 있다.
↑ 코스 : 아차산공원관리사무소 ~ 팔각정 ~ 낙타고개 ~ 아차산 정상 ~ 제2 헬기장 ~ 용마산 정상 ~ 제2 헬기장 ~ 깔딱고개~망우리묘역 ~ 사색의 길 ~ 망우리공원묘지관리사무소
↑ 용마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은 서울을 가로지르며 돌아가는 한강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지난 7일 아차산 제4보루에서 바라본 한강이 손에 잡힐 듯하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1977년 아차산 부근에서 토지구획 작업을 하다 특이한 형태의 토기, 온돌 흔적과 석축, 화살촉 등 많은 무기류가 발견됐는데 집안(集安)지역에서 흔히 나오는 고구려 유물의 형태였지만 이 지역이 백제 땅이었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9월에 아차산에서 고구려 병사들이 쓰던 사발모양의 투구인 복발(覆鉢)과 고구려 토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면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됐고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등 인근 봉우리와 능선에서 16개의 고구려 보루(堡壘)가 확인됐다. 아차산에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게 단순한 전설만이 아닌 사실(史實)로 신빙성을 얻게 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계급을 초월한 연예담 등 전설과 사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중 온달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 아단(阿旦)에서 죽었다는 부분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아단'은 지금의 아차산이다. 죽은 온달의 관을 운구하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자 아내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됐으니 돌아가소서"라고 하자 움직였다는 '짠한' 전설이 남아있다. 구리시는 매년 온달장군 추모제를 열고 있다.
아차산은 신라말, 고려 초에는 호족들 간 각축에서 왕건이 차지했던 것으로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왕이 이곳에서 사냥을 했다거나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들이다. 당시만 해도 온갖 짐승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1960년대에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나온 박격포탄을 갖고 놀다 폭발해 사망했다는 뉴스들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6·25 때도 격전장이었다.
아차산에는 조선 명종 때 유명한 점쟁이였다는 홍계관의 전설도 전한다. 명종이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홍계관을 시험했는데, 쥐의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했다. 그런데 잠시 뒤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 '아차' 하고 사형 중지를 명했으나 이미 홍계관은 죽임을 당했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용마산과 망우산까지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다. 세 산은 능선으로 연결되고 고구려 보루도 나란히 지니고 있다.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종주는 도상으로는 10㎞ 안쪽, 실제는 12㎞ 정도로 3~4시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높낮이가 크지 않은 능선길이 일품일 뿐 아니라 한강과 서울 방향 전망이 모두 좋아 추천할 만하다. 지난 7일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을 거쳐 아차산으로 들어갔다. 아차산역을 통해도 된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가다보면 아차산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들입목이 나온다. 생태공원으로 잘 꾸며 놓았다. 해맞이광장이라 이름붙인 언덕을 오르면 벌써 한강과 서울의 조망이 탁 트인다. 보루를 따라 걷다보면 더 좋은 전망을 여럿 만나게 된다.
아차산에서 용마산(龍馬山)을 바라보면 마치 온달장군이 타던 '용마' 같은 모양과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용마산은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그 같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명 장군봉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역시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의 보루가 여럿 발견됐다.
망우산(忘憂山·281m)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10여분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주능선으로 붙어야 한다. 아차산 끝은 긴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가 돼 있는데 이들 계단을 내려서면 거기서부터 망우산이다.
망우산보다는 망우리공동묘지로 유명하다. '망우리(忘憂里)'란 이름은 태조가 지금의 구리시 건원릉 자리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다 이곳에서 '이제 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하는데, 이곳에 공동묘지가 들어설 것을 예고를 한 듯하다. 망우산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언제 걸어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 같다. 산의 끝자락은 공원묘지관리사무소로 연결된다.
<수도권 명산 30選>“서울 한복판이 내 품안이로다”… 虎탕한 산세
(17) 인왕산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02 14:21 | 수정 2011.09.02 14:31
↑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인왕산의 그림자가 잠겨 있다. 김낙중기자
↑ 풍수적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경복궁을 감싸안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인왕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그래선가, 인왕산은 유별나게 '호랑이'와 인연이 많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모양부터 호랑이와 닮았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인왕산이 마치 호랑이가 남쪽으로 도성을 호위하면서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과 비교하면, 인왕산은 주산을 압도하는 기상과 멋을 지녔다. 조선시대부터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렸지만 북악산을 그린 것은 못 본 것 같다.
실록을 검색해 보면 백악산(白岳山·지금의 북악산)은 68건이 나오지만, 인왕산은 99건이 등장한다. 당시에도 인왕산이 주산보다 더 화제가 된 것이다. 실록에 인왕산이 등장하는 경우는 크게 호랑이와 '풍수 논쟁' 때문이었다. 세조·선조 때 등에 호랑이가 궁궐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인왕산 호랑이'가 괜한 말이 아니다. '인왕제색도' 같은 옛 그림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인왕산이 우거졌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이 됐겠지만 6·25 이전까지만 해도 특히 오래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한양 천도 시 궁궐터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과 무학대사의 '인왕 주산론'이 맞붙었다. 둘은 한양을 도읍으로 하는 데는 의견이 같았으나 궁궐의 방위에 대해서는 달랐다. 무학은 인왕을 중심으로 동쪽 방향으로, 정도전은 북악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궁궐을 짓고자 했다. 결국 정도전이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南面) 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東向)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는 논리로 태조를 설득, 북악이 주산이 됐다.
고려 쇠망의 원인 중 하나를 불교에서 찾아 그것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새로운 유교권력이 애초 승려의 말에 따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인왕산을 중심으로 궁궐을 동쪽으로 짓자면 상당히 어색하다.
지난 8월27일 시계가 맑았던 날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와 너머의 산들을 유심히 둘러보니, 이곳에 올랐을 그 어른들의 풍수 논쟁이 괜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 올라가서 직접 보시라.
인왕산은 조선시대부터 이제껏 이 땅 권부(權府)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본 산이다. 그 동쪽 기슭 동네도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중앙청과 청와대가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풍상을 겪었다. 지금은 몇몇 동(洞)을 제외하고 다소 쇠락한 분위기가 됐다.
인왕산은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의 '1·21사태' 이후 출입이 통제되다 1993년 5월에 개방됐다. 지금은 주변 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산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인왕산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능선을 따라 쌓았던 도성의 성곽이 남아 있다. 사직공원에서 활을 쏘는 황학정을 거쳐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가다가 고개의 초소 맞은편 계단으로 오르는 길이 성곽로를 따라 걷는 인왕산 종주코스의 관문이다.
물론 반대편 독립문 방면에서도 이리로 닿을 수 있다. 그런데 8월30일부터 내년 5월27일까지 성곽 보수공사 때문에 여기 들입목이 통제돼 있다. 이전에는 선바위를 둘러보고 성곽 중간에 능선으로 오르는 '비공식' 루트가 있었는데, 성곽 보수공사 이후 막아 놓아 오를 수 없다. 따라서 인왕산길(도로)을 돌아 '석문'으로 오르는 들입목을 이용해야 한다.
범바위쯤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청와대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범바위를 지나 주봉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돌계단길을 만난다. 돌을 깎아 만든 이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기분도 썩 좋다.
정상에 서면 바로 동쪽 아래편으로 깎아지른 암괴 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매바위와 치마바위다. 종주를 하자면 북쪽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기차바위를 타고 내려가 부암동 하림각 쪽으로 빠지거나 홍제동 채석장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오른쪽으로 자하문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세란병원 뒤쪽 현저동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인왕산 국사당(國師堂)과 '선바위'가 나온다.
이곳에 올라보면 '무속(巫俗)'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그 위쪽으로는 항시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대도시에서 배제된 것들이어서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조선시대, 나라의 굿당이었던 국사당(중요민속자료 제28호)은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 참선한다는 선 자를 따서 이름 붙인 선바위. 김낙중기자
국사당 위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인 선바위(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는 우뚝 '서 있는' 바위라 해서 '선바위(立巖)', 그 모양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것 같다 해서 '선바위(禪巖)'라고도 불렸다.
선바위에는 앞서 얘기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유불(儒佛) 갈등이 깃든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都城)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의견이 대립됐다.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왕성해져 유학이 힘을 못 쓰고, 성 밖에 두면 반대로 승려가 힘을 못 쓰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태조가 결정을 못 내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눈이 녹지 않은 자리가 있어 태조는 그곳에 성을 쌓을 것을 지시했고, 결국 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한양이란 명칭이 '설(雪) 울타리'→'설울'→'서울'로 됐다는 것인데, 근거는 아주 미약한 구전이다.
선바위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네들의 기도처로 조선시대부터 얼마 전까지도 유명했다. 바위 앞쪽에서 보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상이지만, 뒤에서 보면 정말 장삼을 입은 승려 둘이 나란히 앉아 남산과 서울시내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듯하다.
북한산 14성문 종주를 위해 지난 24일 모처럼 북한산성 입구를 통해 북한동을 찾았다가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북한동'하면 낯설지만, 대서문을 지나 북한산성계곡(사진) 주변 마을, 흔히 산성마을로도 불린 이 지역의 행정지명이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이다. 이곳의 술과 파전 등을 팔던 가게를 옮기는 공사가 끝나 계곡이 제 모습을 찾았다.
북한동계곡이 이렇게 넓었던가? 그동안 가게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계곡이 모습을 드러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번 여름 비가 많다 보니 계곡물도 풍성하다. 대서문에서 무량사를 지나 만나는 가게터도 가게들이 사라지니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다. 이곳에 나무덱으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넓고 시원한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사를 하다 떠난 사람들이야 안됐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이 좋은 계곡을 모두 차지하고 가려서 음식을 팔아 주는 손님들한테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슬며시 부아가 날 정도다.
하지만 북한동은 짧게 잡아도 300년 역사가 깃든 동네다. 백제시대 개루왕 5년(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어쩌면 2000년 가까이 된 동네일지도 모른다. 숙종 때 북한산성이 완공되고 군사들이 상주하면서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까지 55가구가 장사를 하며 살았고 올해 초 이전이 완료돼 북한동계곡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가게들은 대개 북한산성 입구에 지어진 새 건물로 이전했다.
징글맞던 비가 멈추고 바람도 하루가 다르게 선선해진다. 추석 연휴쯤 북한산 14성문 종주를 계획해 볼 만하다. 북한산 성문순례는 근래 생겨난 게 아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10월28일자 동아일보에는 '북한산성 일순(一巡), 하이킹 코스 소개'라는 길고 자세한 기사가 실려 있다.
지금 북한산은 등반로가 너무 많이 생겨 문제지만, 당시만 해도 북한산은 '깊고' '험한' 산이어서 산성을 따라가는 게 거의 유일한 '환(環)종주'코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북한산이란 이름은 북한산성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北漢)은 ‘한강 이북’이란 의미의 고유명사다. 따라서 ‘북한-산성(山城)’이지 ‘북한산-성’이 아니다. 북한산이란 이름은 숙종 당시에는 없었고 삼각산이라 불리다가 북한산성이 지어진 뒤 나온 이름이다. 지난 24일 등반객들이 대성문과 대동문 사이 성곽길을 걷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기사를 보면, 북한산성 순례 자체보다 교통편이 없어 들입목까지 가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들입목인 우이동과 구파발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길게 설명하고 있어 웃음이 나온다.
북한산성이 지금처럼 정비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 돼서다. 이전에는 성문 하나, 산성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성문 기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초석과 기단석은 흩어져 있었다.
이를 두고 신문들이 심심하면 사진과 함께 '조지는' 기사를 쓰곤 했다. 지금은 없어진 은평구 진관외동 기자촌에 사는 기자들이 휴일마다 북한산에 올랐으니 '북한산성 훼손' 기사가 툭하면 터져 나온 것이다. 참고로, 북한산 성곽과 성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아니라 문화재청에서 유지·보수를 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한양을 지키는 도성(都城)의 일부가 아니다. 유사시에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하는 행궁(行宮)을 지키기 위해 지어진 산성이다. 즉 정묘·병자 두 호란(胡亂)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혼비백산하며 피해 농성(籠城)했던 경험에서 쌓은 성이다.
14성문 중 대성문은 여차하면 바로 경복궁에서 북악산을 거쳐 형제봉능선으로 넘어와 북한산 행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왕이 드나들 문이다 보니 대성문이 성문 중 가장 크다.
백제시대부터 산성을 쌓았다는 북한산성의 지금 모습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완성됐다. 숙종·영조 때 인물로 북한산성을 쌓는 데 기여한 승려인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성문(城門)은 14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유실된 수문지(문수문)를 제외하고 13개가 남아 있다.
문루(門樓)가 있는 성문으로는 대서문 중성문 대남문 대동문 대성문 북문 등 6개, 암문(暗門)으로는 가사당암문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보국문 용암문 위문 서암문 등 7개가 있다. '암문'은 후미진 곳에 만든 비상출입구로 문루가 없다.
들입목은 북한산성 입구에서 오르는 대서문(大西門)으로 하는 게 편하다. 대서문은 북한산성 4개 방위의 성문 중 서쪽을 대표하며 북한산성의 정문이다. 지금의 문루는 1958년 경기도지사였던 최헌길의 주도로 복원됐고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다.
산성 안의 북한동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애환이 깃든 성문이다. 중성문(中城門)은 북한동계곡길로 다시 20분 정도 올라가면 나타난다. 문루는 1998년에 복원된 것으로, 산성의 한가운데 있다 해서 '중(中)'자가 붙었지만, 북한산성 입구 쪽이 적이 공격하기가 쉬워 대서문과 함께 '두 번 지킨다'는 의미의 '중성문(重城門)'이라고도 전한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가사당(袈娑堂)암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5분 정도 되돌아 나와 국녕사(國寧寺) 입구 좁은 길로 들어서야 한다. 가파른 길을 20여분 오르면 의상능선상에 가사당암문이 보인다. 여기서 부왕동(扶旺洞)암문까지는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등 의상능선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길이자 '산성종주' 중에 가장 험한 코스이기도 하다.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에 있는 부왕동암문은 '북한지'에 소남문(小南門)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청수동암문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청수동암문은 비봉능선에서 넘어올 경우 거쳐야 하는 '깔딱고개' 위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대남문(大南門)까지는 5분 정도면 도착한다. 문수봉 오른쪽에 있는 대남문은 예전에는 '문수봉암문'으로 불렸다.
대남문부터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위문(衛門)까지는 산성능선으로 불리는 비교적 평탄한 길로 두 시간이면 넉넉히 주파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대성문(大成門)은 앞서 말한 대로 성문 가운데 가장 크다.
그다음, 암문인 보국문(補國門)은 원래 동암문(東暗門)으로 불렸으나 그 아래 있는 사찰인 보국사의 이름을 따 보국문으로 바뀌었다.
대동문(大東門)은 동쪽 방위를 대표하는 큰 문으로 1993년에 복원된 것이다. 이어 용암문(龍岩門)은 북한산대피소 부근의 용암봉에 위치하며 옛적에는 '용암봉암문'으로 불렸다.
북한산성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위문'도 원래 이름은 '백운봉(白雲峯)암문'이었다. 암문 중에 유일하게 '위문'으로 불리는데, 일제강점기부터 그렇게 불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부터 대서문 방향으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20여분을 내려오다 상운사로 올라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다시 20여분을 오르면 북문(北門)이 나온다.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안부에 있는 북문은 현재 문루가 유실된 상태다. 방위를 대표하는 네 개 문 중에 북문만 '대(大)'자를 앞에 붙이지 않았는데, 이는 원래 북쪽 방위를 홀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쓸쓸해 보인다.
여기서 원효봉을 넘어 20분 정도 내려가다가 서암문(西暗門)을 만난다. 시구문(屍軀門)으로 불리는데 산성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고 한다. 마지막은 수문(水門)으로 기록돼 있는 '수문지'로 1915년 8월 폭우로 완전히 유실됐다.
▲ 산성탐방안내소~대서문~중성문~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용암문~위문~북문~서암문(시구문)~수문지~산성탐방안내소(총 8 ~ 9시간 소요)
장마가 그친 지 오래지만 올해는 여름 내 장마 같다. '긴-비(長雨)'로 산행을 하는 이들도 훨씬 줄었다. 요즘 근교산을 다녀보면 등산로들이 적지 않이 물길에 휩쓸린 것을 본다. 계속되는 비에 주변의 장사하는 이들이 울상이지만 나무들도 축 처져 지친 모습이다. 모처럼 반짝 갠 18일 청계산을 찾았을 때 휴식터에 앉아 쉬는 등산객들의 화제도 비 얘기다. 비 때문에 모처럼 산행을 나왔다는 초로의 여성은 "여름마다 이러면 어쩔까? 작물들이 녹아날 테니…"하고 한숨을 짓는다.
↑ 얼마만인가? 모처럼 비가 그친 18일 청계산 망경대에 서니 서울대공원 등 과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청계산은 산세 자체는 크지 않지만 사방으로 전망이 좋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청계산(淸溪山·615m)은 서울 서초구, 경기 과천·성남·의왕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네 도시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도 다양하고 오르는 데 부담이 없어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연간 등반객수가 500여 만명으로 휴일에는 6만명 이상이 이용한다. 전체적으로 육산(肉山)이지만 과천 쪽에서 보면 정상인 망경대가 제법 날카로워 골산(骨山)으로 비치기도 한다.
네 도시를 경계로 하다 보니 청계산을 종주하다 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보게 된다. 서초구에서 등산을 시작하면 등산로며 휴식, 안전시설들이 잘돼 있다. 그러다가 매봉을 지나 과천과 성남을 가르는 혈읍재쯤 가면 마치 고속도로를 달려오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예산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서초구나 과천 쪽은 등산로를 가꾼 흔적이 나지만 성남과 의왕 쪽은 그만 못해서일 것 같다.
청계산을 찾을 때면 의아한 게 하나 있다. 나지막하고 산이 깊지도 않으며, 솔직히 그다지 볼품 없는 산인 청계산에 의외로 조선 초에 유명한 선비 여럿이 몸을 은거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 문신 송산(松山) 조윤(趙胤·1351~1425)은 조선 초 이태조가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숨었다. 그는 청계산의 제 1봉인 망경대(望京臺)에 자주 올라 옛 도읍 개경(開京·개성)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그 아래 마왕굴 샘물로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원래는 '萬景臺'였으나 이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또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명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도 이 산에서 은거했다고 전한다.
청계산의 국사봉(國思峰·542m) 역시 이들이 고려를 사모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국사봉이란 이름의 봉우리가 많은데, 거의 대부분 나라를 대표하는 스님을 일컫는 국사(國師)를 쓰는 것과 다르다.
조선조에도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됐으나 청계산 하늘샘에 은거하면서 두 번이나 목숨을 건졌다고 전한다. 이수봉(貳壽峰·545m)은 두 번 목숨을 건졌다 해서 후학인 정구(鄭逑)가 붙였다는 지명이다. 혈읍재(血泣-)는 바로 이상사회가 좌절된 정여창이 피눈물을 흘리며 넘었다는 고개다. 왜 하필 청계산에 숨어 들었을까. 찾지도 못할 만큼 깊지도 않고 한양과의 거리도 지척인데 말이다. 그 '거리'가 뭔가 얘기하지 않을까?
청계산은 시내가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본다. 과천읍지(1899)에는 청룡산(靑龍山)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과천 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볼 때 그 왼편 청계산이 풍수지리의 '좌청룡'이었고, 오른편 수리산이 백호산(白虎山)으로 불렸던 데서 연유한다.
청계산은 의왕 쪽에서는 원터를 들입목으로 해서 국사봉으로, 성남에서는 옛골에서 이수봉으로, 과천에선 서울대공원에서 이수봉으로 오른다. 서초구 쪽에서 오르자면 양재역에서 버스를 타고 트럭터미널이나 개나리골, 청계골, 원터골을 들입목으로 주로 삼는다. 이날은 트럭터미널 부근 개나리골에서 올랐다. 이쪽은 현재 화장장 공사가 한창이어서 어수선하다. 이 코스는 다른 들입목이 초입부터 계단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완만하고 솔밭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30분 정도 소요되는 데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황토가 깔려 있다. 첫 봉우리인 옥녀봉(376m)을 앞두고 다소 경사가 있는 계단길과 돌길이 나온다.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생겨 이름 지었다고 한다.
평이한 길들이 이어지다 원터고개부터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매봉(582m) 부근까지 계단수는 1400여 개나 된다. 계단길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한발 한발 오르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 계단길은 가수 이효리가 'S라인'을 가꾼 길이라 해서 '효리 코스'로 불리는데, 이후에도 요즘 잘나가는 엑스파이브(X-5) 등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데뷔하기 전에 여기서 몸을 만들었다.
조금 더 오르다 보면 매바위 못미처 돌문바위가 나오는데, 이 돌문을 다섯 바퀴 돌며 소원을 빌면 바라는 게 이뤄진단다. 그 다음에 만나는 매봉은 좁은 만경대보다 사실상 정상 대접을 받는다. 여기에서 혈읍재를 지나 10여 분 가다 보면 석기봉과 망경대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다소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면 바로 망경대가 나온다. 바위 위에 서면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은 이수봉과 국사봉을 거쳐 수원 광교산까지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청계사는 2000년 10월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불 중 관음보살상의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꽃이 피어 큰 화제가 됐었다. 우담바라는 여래나 전륜성왕이 나타나는, 3000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이다. 당시 1㎝ 크기의 꽃이 21송이가 피었다. 육안으로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줄기가 버섯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청계사는 108일 동안 전국의 불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법회를 열었고 매일 5000여 명의 불자들이 다녀가는 바람에 불자들이 줄을 서 1㎞의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은 청계사의 우담바라는 풀잠자리의 알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역사의 풍상을 지켜본 남한산성에는 갖가지 설화와 그에 얽힌 명소도 적지 않다. 그런 장소를 찾아보는 것도 남한산성 성곽길 종주의 재미 중 하나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날아갔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나중에야 오해가 풀렸고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온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신성시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관리가 매 발톱 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가 지금은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남한산성 동쪽 외곽 산성을 따라 나가면 벌봉(蜂巖)을 만난다. 바로 동장대터 암문에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 등산로가 수풀이 우거지고 푹신해 걷기에 좋다. 암문 밖에서 보면 벌봉은 벌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병자호란때 청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뜨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해서 이 바위를 깨뜨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전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수어장대보다 높아 남한산성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벌봉이 함락당하면서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고 화포로 성 안까지 공격할 수 있었으니 청태종의 예언이 맞았던 셈이다. 당시 청군에 모질게 당했을 민초들이 공포심에서 만들어 낸 전설일 것이다.
↑ 남한산성 서문과 성곽이 지난 10일 옅은 운무에 가려 있다. 남한산성 서문 성곽 바깥쪽 길은 경기 하남을 둘러싼 객산, 남한산성, 금암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 39.7㎞의 위례 둘레길과 연결된다. 광주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묘하게 이승만 정권 때도 남한산성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1955년 6월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대통령 이승만 박사 송수탑(頌壽塔)'이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됐고, 광주 복정리에서 남한산성에 이르는 새 도로를 이승만의 아호를 따 '우남로'로 명명식을 했다. 탑과 도로 이름은 언젠가 사라졌지만, 남한산성의 대표적 건조물인 수어장대(守禦將臺) 옆, 남한산성에서 가장 숙연한 장소인 '무망루(無忘樓·오른쪽 사진)' 바로 곁에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라는 삐죽한 비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역사의 무게와 상관없이, 남한산성은 오랫동안 서울시민들에게 유명한 피서지요 유원지였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제가 경성(서울)에서 남한산성 내 산성리까지 도로를 뚫고, 당시 착취의 첨병이었을 경성철도가 이곳에 시설투자를 한 것을 보면 관광지로의 개발 가능성을 크게 봤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남한산성은 서울 학생들의 대표적인 소풍 장소였는데, 지금도 산성 내로 들어가는 도로가 아슬아슬하지만, 당시 이곳에서 소풍버스가 뒹구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10일 남한산성 성곽길 종주를 위해 찾았을 때도 산성리에는 고래등 같은 먹고 마시는 집들만 즐비한 가운데 '남한산성 역사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이 서 있어 '무망루'의 정신을 무색하게 했다.
어쨌든 남한산성은 '참 좋은' 등산로다. 역사적 사적지가 즐비할뿐더러, 나이 먹은 키 큰 송림이 우거진 성곽길은 아름답고 경사도 완만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남한산성 성곽은 전체 11.76㎞(본성 9.05㎞, 외성 2.71㎞)지만 성곽길을 빙 둘러 걷는 길은 7㎞ 남짓 된다. 남한산성은 가장 높은 남한산(522m)과 청량산(482.6m) 등 낮은 산들로 둘러쳐져 있지만 성곽길을 한 번 돌자면 간단치는 않아 3시간30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산성리 안에서 시작하자면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이나 산성역에서 내려 9번 버스를 타고 산성리까지 들어오면 된다. 산성리에는 역사관과 옛적 군사훈련을 하던 연무관, 남한산성 행궁 등 구경거리들이 다양하다. 행궁은 보수공사 중이라 내년 초에나 다시 볼 수 있다. 보통 산성리에서 지화문(至和門)으로 부르는 남문을 통해 시계 방향으로 타는데, 이럴 경우 원점산행에 편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찾았을 경우 우익문(右翼門)으로 부르는 서문부터 올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돈 다음 출발지이자 종착지인 서문에서 마천역 쪽으로 하산하면 좋다. 후자 쪽을 택했다.
산성리에서 서문쪽으로 20분 못 미치게 오르다 보면 능선이 나오고 북문을 만난다. 이번 비에 산성 여기저기가 훼손돼 보수가 한창이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적송을 비롯해 소나무들이 볼 만하다. 서문에서 지근거리에 수어장대가 나온다.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수어청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가 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의 세자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그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수어장대 안쪽에 붙여 놓았던 현판이다.
성곽길은 남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남문부터 다시 서서히 오르면서 2개의 옹성(甕城)을 지난 뒤 좌익문(左翼門)으로 부르는 동문으로 경사가 급하게 떨어진다. 동문은 바로 산성리 바닥까지 내려가 있으며 성곽종주에서 유일하게 도로를 건너 만나야 한다. 동문에서 동장대터까지 오르는 길이 성곽종주에서 가장 힘든 코스다. 하지만 주변 경관이 좋아 쉬엄쉬엄 오를 만하다. 하산은 서문에서 학암동 방면으로 해 마천역을 이용하면 된다.
↑ 1968년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당시 치열한 총격전 속에 탄흔이 남겨진 ‘1·21사태 소나무’. 김낙중기자
↑ 2007년부터 전면 개방된 북악산 성곽길이 청운대에 이어 인왕산, 남산으로 뻗어 있다. 가운데로 보이는 서울 시내와 남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선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2일 인왕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와 오른 북악산은 해맑은 얼굴로 반겨 주는 듯했다. 백악산(白岳山)이란 이름도 갖고 있는 북악산은 남경(한양) 천도론이 일던 고려 숙종 당시에는 면악(面岳)이라고도 불렸다. '얼굴산'이다. 그렇게 보면 북악산은 서울의 맑고 귀한 얼굴이다.
그러나 북악산만큼 흉흉한 풍수설에 시달린 산도 없다. 풍수가 유난히 위세를 갖는 우리나라 일반에 북악산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곱진 않다. 가장 흔한 게 '서울의 정룡(正龍)인 북악산이 생기를 내뿜는, 즉 용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역이 지금 청와대 자리인데, 천하 제1의 명당이지만 너무 기(氣)가 세어 사람이 살 곳이 아니고 귀신이 살 자리…'라며 역대 대통령의 운명이 어떻다는 둥 하는 것이다. 또는 북악산의 형상이 뾰족하니 사나워 나라 사정이 순탄치 않다는 둥….
북악산을 둘러싼 풍수논쟁은 조선 창업 당시 도성(都城)을 세울 때 무학대사의 '인왕주산론'과 정도전의 '북악주산론'의 충돌에서 시작됐다. 우리나라 풍수논쟁의 뿌리가 아닐까 싶다. 결국 정도전이 이겼고, 북악을 주산으로 남산을 안산(案山),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게 됐다. 한데 무학은 "내 뜻을 200년 후에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조선 개국이 1392년이니 정확히 1592년에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하는 임진왜란을 겪었다. 정사(正史)에는 없는 이 같은 전언들이 오랫동안 민중의 의식 아래에 북악산의 인상을 흉흉하게 심어 놓았다.
풍수를 허투루 볼 것만은 아니다. 현대철학과 건축이론은 공간이 사람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데 동의한다. 최근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 난리를 겪었지만, 풍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보는 것이다. 그래도 근거없이 재생산돼 온 북악에 대한 풍수론은 벗어던질 때가 된 것 같다. 한번 북악산을 찾아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면 달라진다.
자하문 터널 위 창의문 옆에 북악산 안내소가 있다. 신분증을 지참하고 간단한 출입신청서를 써야 한다.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는 입장할 수 없으며 오전 9시(동절기에는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입산이 가능하다.
창의문은 조선시대 사소문 중의 하나다. 자하문으로 더 잘 알려졌고 북문으로도 불렸다. 예전에 경기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쳤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성곽을 따라 놓인 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쉬엄쉬엄 30분은 걸린다. 정상에는 '白岳山'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다. 정상에서 광화문 쪽을 바라보면 새삼스럽게 북악과 경복궁~광화문~남대문이 자로 잰 듯 일직선상에 또렷하게 놓여 있다. 우리가 평소 잊고 있던 서울의 원래 축(軸)이다. 서울의 나머지 길들은 여기서 뻗어 나간다. 멀리 관악산 역시 직선상에 들어온다. 그러니 관악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숭례문을 남서쪽 방향으로 틀고 현판을 세로로 세웠으며, 광화문 양쪽에 해태상을 세운 것이다. 600여년 전 정도전이 바로 이 자리에 올라 왕도(王都) 구상을 했을 것이다.
정상인 북악마루에서 숙정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1·21사태 소나무'를 만난다. 수령이 200년 된 이 소나무에는 15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당시 '김신조 일당'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 준다. 공비들이 여기까지 왔다면 사실 청와대 뒷덜미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김신조 루트'를 보자면 숙정문에서 빠져나와 오르막과 내리막을 640m 정도 지나면 된다. 김신조 루트의 끝부분에 많은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호경암이 있다. 당시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연계산행이 유행하는 요즘에는 인왕산~북악산~북한산~백련산~안산을 잇는 5산 환종주(環縱走)가 인기를 얻고 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창의문(彰義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여기 고개가 자하문고개로 불려졌다. 양주 등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지만 태종 때 풍수가들이 왕조에 좋지 않다 하여 100년 가까이 통행이 금지됐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반란군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다.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판이 걸려 있다. 1958년 보수했으며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은 북악산 성곽순례 안내소가 옆에 있다.
숨은벽능선에서 된비알 너덜길을 숨이 차게 올라 본격 암반 능선이 시작되는 곳에 해골바위(사진)가 있다. 바위 옆에선 모르고 더 위로 올라와 전망대 바위에서 돌아보면 마치 빚어 놓은 듯한 해골의 모습이다. 누워 있는 해골은 휑하니 두 눈 구멍이 깊게 파여 있고 요즘은 비가 자주 와 그곳에 항시 물이 고여 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득도여행을 가는 길에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바위다.
병자호란 때 척화 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이 청나라로 인질로 잡혀가며 지었다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에서 보듯, 옛적부터 한양의 상징은 삼각산과 한강이었다. 북한산의 원래 지명인 삼각산(三角山)은 한양에서 바라볼 때 뾰족한 세 개의 바위 봉우리인 백운대·만경대·인수봉에서 나온 이름이다.
↑ 지난 25일 숨은벽능선의 전망대바위에서 바라본 숨은벽 슬랩(가운데)이 왼쪽 인수봉 설교벽과 오른쪽 백운대와 함께 운무에 가려 있다. 숨은벽 슬랩은 여러 명이 장비를 갖추고 올라야 한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어릴적 자란 인천에서도 세 봉우리가 보였는데 어른들이 '저것이 서울의 삼각산이다' 했던 기억이 있으니, 수도 한양의 상징이 될 법하다. 그런데 백운대와 인수봉의 뒤태는 고양 쪽에서 올라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왼쪽 인수봉과 오른쪽 백운대 사이에 그 너머에서는 볼 수 없는 칼날 같은 봉우리가 하나 더 나타나는데 그것이 '숨은벽'(정상 768m)이다. 지금도 공식 지도에는 '무명'이다. 서울 도심쪽뿐 아니라 북한산의 동·남·서쪽에서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봉우리라 해서 '숨은벽'이라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봉(峰)'이 아니라 '벽(壁)'이라 이름 붙은 것도 까닭이 있다.
대개 봉우리 이름은 그 유래나 연원을 정확히 모르지만, 숨은벽은 그곳의 코스를 개척한 사람들이 지었다. 옛 자료나 신문을 찾아봐도 '숨은벽'이란 이름은 아예 없다. 과거 삼각산 하면 '바위꾼'(클라이머)'들은 인수봉을, '뚜벅이(하이커)'들은 백운대를 최고로 쳤지 그 사이 무명의 봉우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1973년 고려대OB산악회의 백경호씨를 비롯한 동료들이 한달여에 걸쳐 이 봉우리의 루트를 처음 개척하고 이름을 숨은벽으로 붙였다. 루트를 찾은 뒤 몹시 기뻤는지, 백씨가 노래까지 지었으니 그 노래가 지금도 산악인들 사이에 애송되는 '숨은벽 찬가'다.
'바위야 기다려라 나의 손길을/ 영원히 변치 않을 산사람 혼을/ 울리는 메아리에 정을 엮어서/ 젊음을 노래하세 숨은벽에서.'
'봉'이 아니라 '벽'이라 한 것은 처음 루트를 개척한 이들이 암벽(岩壁)을 타는 클라이머였기 때문이다. 걸어서 오를 수 있었다면 진즉에 '숨은봉'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생겼을 터다. 근래에는 이곳이 등산학교들의 리지교육 코스로 흔히 이용되고 찾는 사람도 하도 많다보니 숨은벽이 아니라 '들킨벽'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숨은벽에서 흘러내려 효자동과 사기막골로 떨어지는 능선이 숨은벽능선이다.
인수봉(810m)이나 백운대(837m)도 뒤태는 분위기가 다르고 이름도 달리 불린다. 백운대 쪽에서 인수봉은 대포알을 세워놓은 듯 깔끔하지만 뒤에서 보면 용의 등처럼 울통불퉁한 암릉으로, 이를 '설교벽(雪郊壁)'이라 부른다. 북향이어서 눈이 가장 먼저 쌓이고 가장 늦게 녹아 '눈 쌓인 성 밖의 벽'이란 의미다. 위압감을 주는 백운대도 뒤에서는 녹록해 보이는데, 죽 아래로 연결된 능선이 이름도 예쁜 '파랑새능선'이다.
지난 25일 끄물끄물한 날씨 속에 효자2동(밤골입구)을 들입목으로 숨은벽을 찾았다. 불광동이나 연신내, 구파발역에서 704번이나 34번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정류장을 지나 효자비, 밤골입구, 사기막골 정류장 중 한 곳에서 내려 들입목을 삼으면 된다.
들입목에서 20~30분 정도를 오르다보면 삼거리 안부 갈림길을 만나는데 여기서 왼편길로 내려서서 조금 더 가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백운대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왼편이 밤골계곡을 건너 본격적으로 숨은벽능선을 만나는 코스다. 능선을 타기 직전에 된비알 너덜길을 만난다. 본격 암반 능선이 시작되는 해골바위를 거쳐 전망대바위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이면서 인수봉과 숨은벽, 백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부터도 숨은벽까지 100여m의 암릉지대가 이어진다. 전망이야 좋지만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벼랑이라 특히 요즘처럼 비가 자주 올 때는 주의해야 한다.
마침내 거대한 벽처럼 가로막는 45m 길이의 대슬랩이 눈앞에 펼쳐진다. 빨래판 슬랩이라고도 부른다. 리지를 하자면 장비를 갖추고 팀을 이뤄 올라야 한다. 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지키고 있어 무작정 오를 수 없다. 이곳에서 바위에 붙어 오르는 이들을 보면 '빨리 등산학교에 등록해야지' 하는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굳이 슬랩을 밟지 않더라도 거대한 암봉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설교벽 암릉과 백운대 암릉이 가파르게 밑으로 흘러내리며 숨은벽과 협곡을 이룬 모습은 장관 그 자체다. 대슬랩 앞에서 오른쪽 밤골계곡 방향으로 빠진다. 50m 정도 내려오다가 왼편으로 백운대와 숨은벽 정상인 768봉 사이의 V안부로 올라 위문을 거쳐 백운대로 가거나, 안부 오른쪽 호랑이굴을 통과해 백운대로 직접 오르는 방법이 있다. 호랑이굴은 10m 정도를 통과하는 좁은 굴로 다소 슬랩이 있어 아슬아슬하지만 요즘은 너도나도 찾는 인기 코스로 자리 잡았다. 백운대에서 북한산 입구나 원효봉 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아니면 그냥 밤골계곡으로 가파르게 내려오면 원점산행이 된다.
서울의 풍수(風水)를 말할 때 도봉산과 삼각산(북한산)으로 시작한다. 풍수가 최창조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룡(來龍)의 맥세(脈勢)로 볼 때, 강원도 철령으로부터 이어온 맥세가 도봉산에서 한껏 생기를 뭉쳤다가 북한산으로 기맥을 넘기는데…." '내룡'이란 풍수에서 근원산(宗山)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가리킨다. 즉 백두산부터 용이 굽이치듯 달려온 맥세가 도봉을 힘껏 밀어 올린 뒤 삼각산으로 넘어갔다는 얘기다.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쓴 '산경표'에도 비슷하게 적고 있다.
↑ 시계가 탁트인 19일 오봉능선 위에서 바라본 오봉의 다섯봉우리와 삼각산 너머로 인천 앞바다까지 눈에 들어왔다. 오봉 중 네번째 봉우리는 꼭대기에 바위 덩어리가 없이 오른쪽으로 삐죽 나와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백두산의 기운이 북에서 내려오다 강원도 평강에서 서남쪽으로 꺾여 한북정맥을 형성하면서 의정부 남쪽에서 도봉산을 일으키고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만들었다…."
북한 땅 강원의 철령은 평강군에 접한 고개다. 다시 최창조의 글로 돌아가면, "도봉산에서 한껏 생기를 뭉쳤다가 북한산으로 기맥을 넘기기 전에 한번 한껏 졸라맸다 보내는 자리"가 바로 우이령이다. 호스의 물을 힘차게 쏘려면 주둥이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듯, 우이령도 벌(蜂)의 잘록한 허리를 닮았다 하여 봉요처(蜂腰處)라 부른다. 도봉산 오봉은 바로 삼각산으로 맥세가 넘어가기 직전에 떡하니 밀어 올린 봉우리다.
도봉산은 우이남능선과 도봉주능선, 포대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오봉은 그 주능선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삐죽이 뻗어 있다. 오봉을 보면 거기서 가까운 여성봉을 안 볼 수 없다. 그러자면 송추유원지 쪽을 들입목으로 송추남부능선을 타는 게 가장 좋다. 여성봉까지는 1시간 이내, 오봉까지 1시간 반이면 넉넉히 올라간다.
지난 19일 송추로 해서 오봉능선을 찾았을 때 날씨가 기가 막혔다. 길었던 장마가 그친 직후 무더위가 몰려온 터여서 한낮 산행이 엄두가 안 났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눅눅하지 않았고 산에는 바람도 모자가 벗어질 정도로 셌다. 정상에 오르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멀리 남서쪽으로 인천공항, 남동쪽으로 팔당호 두물머리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한 중년의 등반객은 "오늘 산에 온 사람은 땡잡은 것이여"하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나중에 알아보니 기온은 높았지만 습도가 50% 정도에 불과했다. 주말까지 이런 날씨가 이어진다면 꼭 오봉능선에 가보시라.
송추유원지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오봉탐방안내소가 나온다. 여성봉까지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르지만 오른쪽으로 상장능선과 백운대·인수봉을 내내 바라보며 오를 수 있다. 날씨가 좋아 백운대·인수봉은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다. 여성봉 밑에서 길이 가팔라진다.
여성봉(女性峰·495m)은 원래 이름없는 봉우리였다. '북한지'(北漢誌)를 비롯해 옛 자료나 과거 신문을 찾아봐도 이 같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아주 근래에 등산객들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고 최근에야 등산지도에도 이름이 올랐다. 여하튼 이전에는 '째진바위' 등으로 불렸는데 그나마 품위있는 이름이 생긴 셈이다.
여성봉은 오봉을 조망하기 좋은 전망대이기도 하다. 바로 오봉에서도 여성봉이 잘 바라보인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되는 전설이 있다. 옛적 도봉산 아래 힘이 장사인 다섯 형제가 살았는데, 새로 부임한 원님의 외동딸에게 모두 홀딱 빠져버렸다. 원님은 형제 중에 산꼭대기에 가장 큰 바위를 올려놓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네 형제는 거대한 바위를 올려놓았지만 좀 힘이 떨어지는 넷째는 제대로 올려놓지 못했다. 오봉 중에 꼭대기부터 네번째 바위에만 '감투바위'라고 부르는 바윗덩어리가 없다.
그러나 원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혼사를 기다리다 지친 딸은 죽고 말았다. 옥황상제가 딸을 가엾이 여겨 여성봉으로 환생시켜주었는데, 짓궂게도 쩍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다섯 형제도 각각 오봉으로 환생해 여성봉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는….
여성봉에서 오봉까지는 20분이 채 안 걸린다. 오봉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암벽등반 코스 중 하나다. 위로부터 1∼2봉까지는 숙련된 사람이라면 릿지로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위험하다. 여럿이서 자일을 타야 한다. 오봉은 도봉산을 포함하는 북한산 전체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명품바위'다.
오봉에서는 삼각산과 북한산 사이 놓인 우이령계곡이 가장 잘 바라보인다. 북한산에서 가장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이다. 오봉에서 자운봉으로 더 치고 올라 도봉유원지 쪽으로 하산하면 뻐근한 산행이 된다. 원점회귀를 하자면 송추계곡갈림길로 내려오는 게 편하다.
여성봉에 금줄이 쳐졌다. '19금(禁)'인가?
마치 다리를 벌리고 은밀한 부위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을 한 도봉산 여성봉은 근래 등산객들의 사랑을 몹시 받고 있는 봉우리다. 그래서 문제가 됐다. 등반객들이 많이 찾다 보니 일부가 훼손돼 지난 3월 도봉산관리사무소가 오르지 못하도록 줄을 쳐 놓은 것이다.
지난 19일 찾았을 때 역시 훼손이 눈에 띄었다. 우선 2년 전에 왔을 때는 갈라진 틈에 풀과 이끼가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풀과 이끼가 있을 때는 아주 가물은 철이 아니면 물기도 다소 있었지만 지금은 싹 말라있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면서 모양을 망쳐놓은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송추분소에 따르면, 특히 남성 등반객들이 굳이 갈라진 틈새를 밟고 지나다닌다는 것이다. 은밀한 '둔덕'도 다소 바위들이 닳아 있었다.
이날 만난 50대 여성 등반객은 "특히 단체로 온 남자등반객들이 술을 마시고 공연히 틈새에 발을 담그거나 차서 이런 훼손이 생겼다"며 "막아놓길 참 잘했다"고 말했다.
여성봉 입구의 갈라진 틈 위쪽에는 바위 위에 절묘하게도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질 듯 위태하게 살아남아 있다. 기자가 살펴보느라 가까이 가자 한 중년등반객이 "올라가지 말라고 줄을 쳐놓았는데 못 보았느냐"며 야단을 친다. "미안하다"고 하고 자리를 비켰다. 이처럼 등반객들이 서로 주의를 주면서 보호한다면 더 이상 훼손이 없이 보존이 될 것 같다.
여성봉의 갈라진 부위로 올라서자면 가파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지난해에는 무리하게 올라가려다 다리 근육이 파열된 등산객도 나왔다고 한다. 관리공단은 여성봉 오른쪽으로 나무계단을 만들어 우회할 수 있도록 했다. 여성봉의 훼손을 막고 부상당하는 일도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관을 해치지 않게 잘 만들어져 있었다. 조물주의 짓궂음이 빚어놓은 여성봉을 사람들이 헤쳐서야 되겠는가.
여름에는 아무래도 능선보다 계곡 산행이 수월하고 제격이다. 북한산에는 정릉계곡, 구천계곡, 소귀천계곡, 육모정계곡, 효자리계곡, 구기계곡, 산성계곡 등 이름난 계곡이 적지 않지만,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을 잇는 길이 계곡 산행 코스로는 제일이 아닌가 싶다. 그 중간에 지금은 부왕사지 코스라 부르는 청하동(靑霞洞) 골짜기를 끼워 넣으면 비봉능선까지 고루 맛보는 뻐근한 등산 코스가 된다. 역사·문화 유적지도 덤으로 살필 수 있다.
↑ 지난 11일 북한산 삼천사계곡이 장마철을 맞아 시원한 물줄기를 내려보내는 가운데 한 등반객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 계곡 산행은 주의해야 한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단 요즘 같은 장마철 계곡 산행은 물 구경이야 좋지만 주의를 요한다. 지난해 8월 초 태풍 뎬무가 왔을 때 삼천사계곡 입구가 폭우로 갑자기 불어 야영객 2명이 물에 휩쓸려 숨진 바 있다. 지난 11일 장맛비를 뚫고 삼천사 계곡을 찾았을 때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우중 등반객'들을 쫓다시피 하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북한산 덩어리의 서쪽인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은 응봉능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예전에 아직 자동차와 레저 문화가 퍼지지 않았을 때, 진관사는 서울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유명했고 계곡은 한여름이면 물놀이나 캠핑하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던 곳이다. 요즘이야 등반객들이나 지나다니지만. 삼천사계곡은 1968년 1·21사태 이후 한동안 출입이 통제됐다가 1990년대에 열린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문에 사람의 발길을 덜 탔다는 느낌이 조금 드는 계곡이다.
7211번이나 704번 버스를 타고 삼천리골 입구에서 내리면 삼천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10여분 올라가면 '삼각산 삼천사(三角山 三千寺)' 현판을 단 일주문이 나온다. 삼천사계곡은 세 개의 골(谷)이 만난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삼천사(三川寺)라고도 돼 있다. 원래 삼천사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더 올라가 부암동암문에 못 미쳐 왼쪽으로 증취봉 아래에 있었다. 지금은 '절터'라고 불리는 자리 두 곳에 거대한 석축 등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유북한기'에는 이곳이 고려시대에 삼천승동(三千僧洞)으로 불렸다고 했는데 무려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 있었다는 얘기다.
삼천사계곡은 장맛비로 인해 물이 지천이다. 삼천사에서 20여분 오르면 계곡에 널찍한 너럭바위가 나오고 그 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볼만하다. 줄을 쳐 들어가는 것은 막았다. 좀 더 오르면 삼거리 부근에 비봉 쪽으로 폭포가 하나 있다. 한 등반객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몹시 추워 보인다. 여기 세 갈림길 중 맨 오른쪽은 비봉능선 승가봉과 비봉 사이인 사모봉 옆으로 오르게 되고, 가운데는 청수동암문-문수봉으로 바로 향하게 된다. 왼쪽이 부암동암문으로 오르는 길이다. 사모봉으로 바로 오르면 비봉 직전에서 진관사계곡으로 곧바로 내려갈 수 있어 가장 짧은 코스다. 하지만 청하동 골짜기를 보기 위해 왼편 코스를 택했다.
의상봉능선 중간에 있는 부암동암문을 넘어서면 바로 증흥사지 부근 북한산성계곡으로 내려가는 청하동계곡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등산로가 있지만, 계곡물은 변변치 않아도 이곳 길이 호젓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북한산을 찾을 때마다 들르게 된다. 동(洞)이란 '아름다운 골짜기'를 가리킨다. 선능의 북한지(北漢誌)에 보면 북한산에는 백운동·중흥동 등 18개의 '동'이 있는데, "청하동은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것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며 북한산 18동 중 최고로 치고 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청하동은 봄에는 신록, 여름엔 녹음, 가을엔 단풍과 낙엽 등 계절마다 빼놓을 데 없이 아름답고 그윽하다.
청하동 아래에서 오른쪽이 대남문으로 오르는 코스다. 대남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가다 청수동암문을 통과해 깔딱고개에 내려서면 그때부터 비봉능선이 시작된다. 비봉능선은 볼거리가 많지만 걷기에도 편하다. 승가봉을 거쳐 사모바위와 만나게 된다. 사각 모양을 가리키기도 하는 '사모'는 옛적 벼슬아치의 의관인 사모관대(紗帽冠帶)의 모자 '사모'와 비슷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사모바위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점심 즈음이면 으레 여기서 도시락을 편다.
비봉 직전에 오른쪽으로 진관사계곡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비봉은 국보 3호인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곳이다. 물론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해 보관돼 있고, 현재 있는 비석은 복제한 것이다. 비봉 일대도 언제부터인가 사적으로 지정해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대개 한번쯤은 올라 본다.
진관사계곡은 삼천사계곡만 못하고 길이도 짧다. 마지막 진관사로 내려서는 구간이 가파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계곡은 그렇다 쳐도 사찰의 멋은 진관사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이다. 비구니들이 있는 곳이라서일까. 사찰의 분위기가 정갈하고 편안하다. 삼천사가 좁은 공간에 이것저것 대리석 조성물을 장식해 어지러운 것과 대비된다.
의상봉에도 기기묘묘한 바위가 많아 명물바위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의상봉을 오르다 첫 번째 슬랩을 올라서면 제법 넓은 바위지대가 나오는데 그곳에 아주 기묘한 모양의 바위가 서있다. 일명 쌍토끼바위 혹은 코뿔소바위로 불린다.
그 이유는 보는 각도에 따라 토끼 두 마리가 입 맞추는 모양이 됐다가 방향을 틀면 코뿔소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쉬어 가는 이들이 많다.
또 용혈봉에서 내려서서 증취봉을 오르기 전에 돌아보면 할미바위 혹은 동자승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마치 사람의 상반신처럼 생겼는데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의상능선뿐 아니라 요즘 북한산에서는 까마귀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까악~까악~' 울어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린다.
아마도 등반객들이 던져주는 김밥 등을 먹이로 해서 살아가는지 사람을 그다지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일부러 까마귀와 사귀려는지 먹이로 '꼬시는' 등반객들도 있다. 새로운 풍경이다.
북한산 예찬론자들이 워낙 많아 좋아하는 코스도 제각각이지만 '의상능선'을 선호하는 코스로 꼽는 이들이 가장 많지 않을까. 예전에 - 북한산 입산료를 받을 때보다 이전에 - 의상능선은 '산 좀 탄다' 하는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는 코스였다. '의상능선 타고 왔다'하면 '우와!'했었다. 지금처럼 계단과 쇠밧줄, 안전설비가 제대로 없던 시절에 의상능선은 전부 위험구간이었다. 요즘에는 휴일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앞사람 꽁무니에 코를 박고 가야 할 만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 북한산 의상능선은 북한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코스다. 지루한 장마 속에 잠깐 개었던 6일 등반객들이 의상봉에서 북한산의 가장 큰 봉우리인 백운대 쪽을 바라보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의상능선은 능선 자체도 험하게 아름답지만 그 전체가 북한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고 보면 된다. 달리 의상능선이 아니다. 북한산 제1봉인 백운대와 그 왼쪽으로 늘어선 염초봉, 원효봉, 오른쪽의 만경대, 노적봉 등의 허옇고 거대한 암괴를 가장 화려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의상능선이 놓여 있다.
그 사이로 도봉산의 오봉을 비롯한 연봉도 보인다. 뒤로 돌아서면 삼천사계곡의 '녹음 바다' 건너로 응봉능선이 나타나고 사모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는 비봉능선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봉능선 전체를 볼 수 있는 곳도 의상능선이 유일하다.
전국에 의상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한 백개는 되지 않을까. 그만큼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전국 곳곳을 누비고 끼친 영향도 컸던 모양이다. 조선 숙종·영조대의 승려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 보면 "의상봉은 그 아래에 의상대사가 주석했던 곳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적혀 있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앞에는 '선비화'란 나무가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떠나면서 심어놓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바로 그때 의상이 간 곳이 북한산 의상봉 아래라고 '북한지'에는 적혀 있다.
의상능선의 들입목은 704번 버스를 타고 가다 백화사 입구나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려 시작하면 좋다. 거꾸로 대남문 옆 문수봉에서 의상봉 쪽으로 탈 수 있지만 내려오는 코스라 편할지 몰라도 의상능선을 제대로 타는 것은 아니다.
의상봉은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봉우리를 가리키는 의상'대(臺)'로도 불렸을 만큼 곧추서 있다. 여기부터 숨차게 오르는 게 의상능선에 대한 '예의'다. 백화사 쪽이 한적한 숲길로 접근할 수 있어 더 좋다.
한 20분쯤 가다보면 가파른 정도가 갑자기 심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의상봉을 오르게 된다. 502m밖에 안 되지만 거의 평지에서 튀어오르듯 서있어 실제 오르는 데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얼마전까지도 없던 계단이 설치된 곳도 있어 예전처럼 다리뿐 아니라 팔까지 뻐근해 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경험자와 가는 게 좋다.
'북한지'에는 지금과 달리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미륵봉'이라는 봉우리가 하나 더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봉우리가 있다가 사라졌을 리는 없고, 의상봉은 봉우리 두개가 합쳐진 듯하게 생겨 있는데 아마 옛적에는 각각에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의상봉에서 용출봉(571m)으로 가자면 뚝 떨어졌다 오르게 된다. 용출봉과 용혈봉(581m), 증취봉(593m) 사이가 기기묘묘한 암반길이어서 의상능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주의점. 2007년 7월 하순에 용혈봉 정상에서 끔찍한 낙뢰사고가 있었다. 무려 4명이 죽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용혈봉은 봉우리에 나무도 없이 바위여서 등산객이 바로 '피뢰침'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긴 사고다. 비 오는 날은 의상능선을 타지 말아야 한다. 중간에 비를 만난다면 스틱 등 쇠붙이를 잘 간수해야 한다. 용혈봉을 지날 때는 항상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옷깃을 여민다.
의상능선에는 샘이 없기 때문에 요즘 같은 한여름엔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지나는 등반객들도 물이 떨어진 모양으로 한 중년여성이 동행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다 줘도 물은 못 줘"라며 걸쭉하게 말해 웃음바다가 됐다.
하지만 지도엔 없지만 기자가 아는 샘이 하나 있다. 증취봉과 나월봉 사이에 있는 부왕사암문에서 부왕사지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탁 터진 공터가 나오는데 거기 끝에 샘이 있다. 아주 시원하다.
증취봉 ~ 나월봉은 아마 가장 까다로운 코스에 속한다. 우회로를 선택하라는 푯말이 서 있고 밧줄로 막아놓았다. 하지만 우회로가 별로 좋지 못하고 자칫 길을 잃기 좋게 생겨 있다. 조금 위험하지만 탈 만하다. 단 경험자와 꼭 같이 타야 한다.
끝에 있는 나한봉은 그다지 볼품은 없다. 문수봉(732m)을 만나면 의상능선은 종점에 온 것이다. 문수봉의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의상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대남문을 통해 북한산성 입구로 혹은 반대편 구기동으로 하산하면 된다.
의상능선 등산코스
▲ 백화사 ~ 의상봉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 문수봉 ~ 대남문
'봄 철쭉, 가을 단풍'의 소요산이지만 여름에도 괜찮다. 산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원효폭포를 비롯해 자재암 안쪽의 옥류폭포, 하백운대와 상백운대 사이 계곡에 숨어 있는 선녀탕폭포 등 아담한 폭포들이 연이어 나온다. 특히 요즘에 수량이 많아져 볼 만하고 시원한데, 6월28일 찾았을 때는 선녀탕계곡에 물안개도 피어올랐다.
◆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 장맛비가 잠시 주춤했던 6월28일 경기 동두천 소요산의 선녀탕폭포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 냈다. 선녀탕계곡의 좁은 협곡 사이에서 등산객들이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고 있다. 동두천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전철로 가기 편한 소요산은 의정부·동두천 등 경기 북부 주민들에게 친근한 산이다. 규모는 작지만 기암괴석의 계곡을 품고 있고, 자재암을 입구로 해서 말굽 모양으로 봉우리들이 둘러쳐져 있어 원점산행이 용이하다. 그렇다고 쉽게 볼 산은 아니다. 제법 가파르고 길어 한 바퀴를 돌자면 넉넉히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소요산 이름의 '소요(逍遙)'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나온 말이다. 현대에는 슬슬 거닐어 돌아다닌다는 의미로 쓰인다. 소요산에는 선가(仙家)와 인연이 있는 조선 중기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과 화담 서경덕(1489~1546년)이 유유자적하며 머물렀다는 얘기들이 전한다. 그 때문에 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그보다 앞서 974년(고려 광종 25년)에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 산과 봉우리 이름에는 '선도'에서 따온 것이 적지 않아 이상할 건 없다. 요즘에는 평일에 주변 도시의 노인들이 소요산 입구에서 유유자적하며 노닌다.
소요산은 선가보다는 아무래도 불가(佛家) 쪽과 인연이 깊다. 원효대사(617~686년)와 요석공주, 두 분의 아들인 설총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차녀인 요석공주가 원효대사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소요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던 원효대사를 따라와 수행처 근처에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 자재암 부근에는 요석공원이 있고 별궁지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공주봉은 요석공주에서 온 이름이다. 제대로 된 근거자료는 없는 얘기들이지만 자재암도 원효가 지은 사찰로 전해진다.
그런데 원효의 전설이 깃든 소요산의 최고봉이 의상대인 것도 재미있다. 알다시피 의상(625~702년)은 원효와 당 유학길을 동행했다가 원효는 도중에 되돌아왔고 의상은 유학을 끝까지 마쳤다. 의상은 '유학파'로 국사(國師)의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원효는 민초들에 섞여 살았다. 그런데 소요산에는 의상대가 공주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 경기의 '소금강'
서울에서 소요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4㎞다. 소요산을 두고 '한수(漢水)' 이북 최고의 명산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으로도 불린다. 특히 가을에 오랜 세월의 풍화를 겪은 기암괴석이 단풍과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 같다.
산행은 소요산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산의 규모는 작지만 된비알도 여럿이고, 칼바위 등 위험구간들도 있다. 자재암에서 주요 코스가 갈라진다. 길게 타자면 바로 왼쪽 하백운대 방향으로 오른 뒤 시계 방향으로 돌면 된다. 선녀탕과 폭포를 보자면 오른쪽으로 속리교를 건너 죽 오른다. 선녀탕에서는 정상 능선으로 바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여럿 되기 때문에 코스를 놓고 망설일 것은 없다.
소요산에서 가장 힘든 세 코스는 자재암에서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과 나한대에서 의상대 사이에 있는 칼바위, 나한대 된비알 등이다. 이번에 가보니 곳곳에 계단을 설치하고 쇠말뚝과 로프로 안전시설을 해놓아 한결 등반이 수월했다.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도 많고, 건너 의상대능선을 보면서 오를 수 있다.
하백운대까지만 올라도 이미 정상 능선을 타게 되는 것이다. 중백운대(510m)와 상백운대(559m)를 지나면 만나는 것이 500m에 이르는 칼바위능선. 조심해야 하지만 좌우로 경관이 좋다. 칼바위능선을 지나면 고도상 100m 이상은 내려가게 되는데 이어 나한대(571m)를 만난다. 그래서 다시 가파른 코스를 오르게 된다. 나한대~의상대능선에서는 동북쪽 광덕산과 화악산, 서쪽 마차산, 감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 정상은 기대보다 볼품은 없다. 바위로 이뤄져 있고 정상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 사이의 코스는 이번 태풍 '메아리'로 인해 일부 등산로가 훼손돼 있었다. 굴러떨어진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조심해야 한다. 공주봉을 거쳐 일주문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종주 코스다.
등산코스
▲ 소요산역-관리사무소-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선녀탕-관리사무소(1시간30분)
▲ 소요산역-관리사무소-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관리사무소(2시간30분)
▲ 소요산역-관리사무소-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공주봉-관리사무소(4시간)
▲ 원효대 해탈문(解脫門) = 동두천시는 최근 소요산 원효대 코스에 '해탈문'을 설치했다. 해탈문은 108계단 위에 세워졌고 불교의 윤회를 형상화한 4조각의 나무로 구성됐다. 108 번뇌를 의미하는 108계단을 올라온 뒤 속세의 수많은 번뇌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소요산에 와 그동안 쌓인 번뇌와 스트레스를 떨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고자 만들게 됐다고 한다.
▲ 소요산 풍혈(風穴) = 소요산에도 풍혈이 두 군데가 있다. 겨울에는 더운 바람, 여름에는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을 말한다. 모두 이 산을 자주 타는 지역 주민들이 발견했다.
공주봉 풍혈이 조금 더 크다. 이 풍혈은 공주봉 북서릉상 헬기장 북쪽에 숨어 있다. 약 4m 깊이 바위 웅덩이 속으로 내려서면 남쪽 방향으로 폭 1.5m로 벌어진 바위 틈이 있는데, 그 안쪽 약 2m 깊이 틈에서 바람이 나온다. 이 바람은 겨울에는 눈을 녹일 정도로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중백운대에서 50m 떨어진 곳에도 풍혈이 있다.
중부지방으로 장마전선이 올라온다는 예보가 있던 22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경기도 양주 불곡산(佛谷山·465m)을 찾았다. 역시나 새벽부터 하늘이 꾸물대더니 전철 1호선 양주역에 도착하자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가 흩뿌렸다. 수도권에서 전철로 닿을 수 있는 산 중 불곡산처럼 아기자기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산도 드물다. 암릉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어 산의 높이와 규모에 비해 '만점짜리 스릴'을 느낄 수 있다.
↑ 중부지방에 장맛비가 시작되던 22일 경기 양주시 유양동 불곡산의 임꺽정봉이 운무가 걷히면서 위용을 드러냈다. 불곡산 자락에는 임꺽정의 생가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주=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양주역에서 내려 건너편에서 32번 버스를 타면 양주시청과 백화암 입구, 백석대교아파트를 차례로 지나간다. 대교아파트에서 하차하면 두 개의 코스를 만난다. 내리자마자 10m쯤 더 가면 등산 안내판이 나오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지도상으로 임꺽정봉을 왼쪽부터 오르게 된다. 다른 코스는 정류장에서 100여m를 되돌아가 공장지대 뒤쪽으로 해서 악어능선으로 바로 치고 올라가는 암릉 코스다. 악어능선은 임꺽정봉을 거친 뒤 볼 수 있기 때문에 앞에 코스를 택했다.
한 30여분 올라가 첫 능선을 만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바로 임꺽정봉으로 향하게 된다. 임꺽정봉 직전에 불곡산에서 가장 길고 가파른 직벽형 슬래브(slab)를 만난다. 이전에 왔을 때는 40m 높이의 슬래브에 로프만 달랑 걸쳐 있었으나 이번에 가 보니 옆으로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이 슬래브는 그냥 리지로 오르기도 하는데 올라갈수록 경사가 가팔라 상단에서는 아찔함을 느낀다. 비가 왔을 때는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드디어 임꺽정봉이다. 하지만 몰려드는 짙은 운무에 가려 봉우리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장 사진이 문제다.
"꺽정이 형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부·탁·해요~."
사진기자와 함께 '이덕화 버전'으로 외쳐 댔다. 지나가던 등반객들이 사정을 듣고는 같이 외쳐 준다. 기도가 통했을까? 바람이 한 차례 휙 하며 지나더니 순식간에 임꺽정봉이 얼굴을 드러냈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임꺽정이 불곡산에 살았을까?
임꺽정봉은 위압감을 줄 정도로 크지 않다. 백정으로 태어나 나라를 뒤흔든 도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일생이 투영돼서일까. 쓸쓸해 보인다. 불곡산에는 임꺽정이 어릴 적 뛰어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굴곡이 심하고 아기자기한 불곡산의 바위능선을 보면 그가 뛰놀며 무술을 닦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사실 수도권 산 중에는 파주 감악산을 비롯해 '임꺽정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여럿 된다. 민초들에게 그 이름이 깊게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양주 불곡산은 임꺽정의 고향이 맞을까? 양주시에서는 몇 년 전 역사학자들에게 의뢰해 탐사와 노인들의 고증을 받은 적이 있다. 양주시청에 들러 당시 보고서를 봤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등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 임꺽정의 신분과 출생 지역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단지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기재잡기(寄齋雜記) 등 개인의 저술에 임꺽정이 양주 출신이며 백정의 신분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당시 양주목의 어디가 그의 태생지인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벽초의 소설 '임꺽정'에선 양주읍 유양리로 태생지를 설정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규명함에 있어 전설과 소설을 근거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양주문화원 소장을 지낸 백운화 경민대 교수는 16세기 양주 읍치(邑治·관아가 있는 곳)의 형태를 분석해 임꺽정의 출생지를 추정했다. 조선시대 양주목의 읍치는 현재의 양주읍 유양리(현재는 유양동)라는 것이다. 읍치 내의 거주자는 관아의 행정직 종사자나 양반들이었을 것으로 볼 때 취락 구조상 백정 신분인 임꺽정의 생가터는 현재의 유양초등학교 뒤쪽 불곡산 자락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양주시는 이곳에 '임꺽정생가보존비'를 세워 놓았다. 임꺽정봉에서 상투봉과 상봉을 지나 오른쪽으로 백화암 코스를 내려오다 만날 수 있다. 옛적에는 백화암 골짜기 주변을 청송(靑松)골로 부르기도 했다는데 임꺽정의 소굴인 '청석골'과 연관 짓기도 한다. 백화암 코스는 다소 가파르다. 양주시청 쪽으로 하산하면 다소 지루하긴 하지만 걸어서 양주역까지 닿을 수 있다.
▲ 1코스(4시간):유양초등학교 앞 정류장-백화암 입구-백화암-십자고개-상봉-상투봉-임꺽정봉-계곡-부흥사
▲ 2코스(3시간):대교아파트-샘터-삼거리 안부-슬래브-임꺽정봉-상투봉-상봉-십자고개-백화암-백화암 입구
▲ 3코스(4시간):대교아파트-샘터-삼거리 안부-슬래브-임꺽정봉-상투봉-상봉-십자고개-송전탑-삼거리-양주시청
고대산(832m)은 경기도 최북단인 연천군 신탄리와 강원 철원군 경계에 있다. 산 정상의 8부 능선에 위치한 칼바위 전망대와 삼각봉 그리고 정상인 고대봉에 오르면 북녘 산하와 남측 최전방인 철원평야, 백마고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한 등산동호회 회원이 고대산 정상(고대봉)에 올라 북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를 가리키고 있다. 연천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그래서 이북 실향민들 중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또 이 일대에서 군복무를 했던 40~50대 등산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산이기도 하다. 등산 애호가들이 고대산을 자주 찾는 이유는 또 있다. 뛰어난 전망에다 암릉이 이어지는 능선이 계속되는 등, 산행의 맛이 아기자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도권에서 전철과 '통근열차'를 이용,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고대산을 수도권 명산으로 꼽는 이유 중 하나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고대산에 오르는 길은 세 갈래로 오른쪽부터 제1등산로, 제2등산로, 제3등산로다. 제1등산로는 완만해서 오르기가 쉬운 편이지만 코스가 좀 길다. 제2등산로는 가파른 오르막과 적벽을 이루는 능선으로 조금은 힘겹지만 가장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제3등산로는 고대산 북쪽 사면을 휘돌아 오르는 코스로 가장 길지만 완만하다. 그래서 여성 애호가들은 3코스에서 2코스로, 운동 좀 하겠다고 달려든 산악인들은 2코스-3코스를 선호한다.
지난 14일 오후 산행에서는 2코스로 올라 3코스로 하산해 보았다.
등산로 입구를 지나 돌계단을 올라서면 수만평 넓이의 낙엽송 숲길이 나온다. 낙엽송 숲을 지나 안부삼거리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거리다. 해발 800m를 조금 넘는 산치고는 코스가 상당히 길고 급경사가 이어진다. 노송과 조화를 이룬 말등바위를 지나 군데군데 로프가 설치된 산길을 계속 오르다 보면 양쪽이 수십 길 절벽을 이룬 칼바위 능선을 만난다. 칼바위는 고대산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지만 절벽 양쪽에 굵은 로프로 난간이 설치돼 있어 안전하다. 칼바위 능선은 150m가량 이어진다. 칼바위 전망대에서도 철원평야가 훤히 보인다.
날씨가 화창했던 이날에는 멀리 휴전선 너머의 북쪽 고지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대광봉-삼각봉에 이어 고대봉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는 철원군 동송읍이 금학산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6·25전쟁 때 격전지였던 백마고지와 철원평야, 그 너머로 멀리 북녘땅이 펼쳐진다.
고대봉 정상에는 새롭게 헬기장이 조성됐다. 마치 나무로 쌓은 재단같다.
정상에서 펼쳐진 철원평야와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를 가늠하면서 60년 전의 6·25전쟁을 반추해 본다.
정상 아래 펼쳐진 평강, 철원, 김화지역은 북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6·25전쟁 당시 중국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이다. 당시 이 일대를 '철의 삼각지'라고 부르게 됐다. 그 중 가장 치열하고 큰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였다고 한다. '백마고지'란 이름은 당시 열흘간의 전투가 끝난 뒤 항공촬영을 하던 외신기자가 "포격으로 산 정상의 나무와 풀이 모두 사라져 하늘에선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붙여졌다고 한다.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한국군 9사단과 중국군 38군 3개사단은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모두 27만4950여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열흘 동안 양측은 12차례 고지 점령과 탈환을 되풀이했고, 중국군 1만여명 한국군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김일성은 이 철원평야를 뺏긴 뒤 3일간 식음을 전폐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렇듯 고대산 일대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산행의 처음부터 산행의 정점에서의 조망까지 분단의 현실을 한시도 떨치지 못한다.
고대봉 정상 직전의 대광봉과 삼각봉에서는 남쪽 조망도 훌륭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남서쪽 약 60㎞ 거리의 도봉산과 북한산이 보인다. 더 쾌청한 날에는 휴전선 너머인 개성 송악산과 천마산까지 보인다. 이따금 이곳에 오른 육순이 넘은 어르신들이 북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하곤 한다는데, 그들의 고향이 개성이나 황해도라고 한다.
하산은 두 코스가 있다. 다시 돌비석봉으로 되돌아와 제2코스 능선길로 내려와도 괜찮다. 그러나 고대산의 백미인 표범폭포를 보려면 제3코스로 내려서는 것이 좋다. 정상에서 북릉을 타고 5분 거리에 이르면 작은 공터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왼쪽 북서릉을 타고 1시간가량 내려가면 표범폭포에 닿는다.
그러나 본래의 제3코스는 이 삼거리에서 북릉으로 10분 더 간 곳인 부대막사 직전 삼거리에서 매바위로 이어지는 북서릉 길로 내려서는 코스가 정석이다. 매바위 방면 북서릉으로 40분가량 내려서면 매바위 직전 안부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서게 된다. 계곡길로 발길을 옮겨 5분 거리에 이른 다음, 오른쪽 급경사 길로 100m가량 내려서면 표범폭포 하단부에 닿는다.
약 100m 높이로 깎아지른 절벽인 매바위 하단부에 자리한 표범폭포는 규모가 폭 20m에 높이 30m에 달하는 수직절벽에서 하얀 포말을 뿜어내며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지난 14일 산행에서는 아직 수량이 적은 탓에 적벽을 적시는 정도의 물길이었다.
장마가 지나고 나야 장관을 이룰 것같다. 표범폭포에서 다시 본계곡길로 올라온 다음, 남서쪽 협곡으로 이어지는 계곡길로 15분가량 걸어 빠져나오면 고대산 주차장에 닿는다.
고대산행은 어느 코스를 타든 왕복 7.5㎞ 정도로 4시간30분 정도를 잡아야 한다.
코스
▲1코스:주차장~큰골~고대산 정상(3.65㎞) ▲2코스:주차장~칼바위~고대산 정상(3.20㎞) ▲3코스: 군부대자리~폭포~고대산 정상(3.65㎞)
수도권 등산 동호인들에게 '고대산행'이 즐거운 것은 '통근열차'를 통해 잊어져 가는 시골열차의 낭만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수도권의 광역전철망 구축으로 서울 인근에서 기차여행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은 흔치 않다.
↑ 신탄리역 북쪽에 설치된 ‘철도 중단 표지판’.
남북 분단의 상징이 돼버린 경의선(京義線)과 경원선(京元線) 일부구간에서 '통근열차'라는 형태로 디젤전동기차가 운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고대산 산행의 기점이자 종점인 신탄리역(新炭里驛)은 경원선의 남쪽 중단 역이다. 경원선은 원래 서울과 원산을 잇는 철도였다. 1913년 7월10일 개통한 이후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던 기차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신탄리역이 종점이 되어 회차하게 되었고, 신탄리역에서 옛 철원역을 지나 휴전선 너머 평강 사이에는 철길이 없어진 상태다. 북한에서는 분단 이후 평강부터 세포~사방~남산~안변~고산~통지원~갈마~원산을 지나 고원으로 이어지는 경원선을 '강원선'이라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그동안 남측 철도는 수도권 광역전철사업으로 시발점도 용산에서 의정부로, 다시 동두천역으로 변했다. 동두천역에서 매시 50분에 신탄리행 '통근열차'가 출발한다. 수도권 전철을 이용, 동두천역에 40분 정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는다면 여유롭게 환승, 50여분간의 '시골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전철을 이용할 경우 동두천역 3, 4번 플랫폼으로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데 따로 표를 끊지 않아도 기차를 타고 나서 승무원에게 기찻삯을 줘도 된다. 요금은 평일·주말 1000원으로 통일했다.
빨간 벽돌 벽에 푸른 지붕을 한, 마치 아름다운 별장 분위기인 신탄리역에 이르면 남동쪽으로 병풍을 두른 듯 하늘금을 이루는 고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대산으로 오르기 위해 철길을 건너다 보면 왼쪽에 철도 중단 표지판이 보인다. 휴전선에서 약 9.5㎞ 떨어진 남한 최북단 신탄리역 북쪽 300m쯤의 철로를 가로막고 서있는 높이 3m의 철제판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이 적혀 있다.
이형주 신탄리역 열차운영원은 "평일에는 600~700명이 우리 역을 이용하며, 주말에는 2000여명이 신탄리를 찾는다. 평일에는 실향민들과 거주민들이, 주말에는 고대산행을 하는 등산 애호가들이 신탄리역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감청색의 산빛이 높이 솟은 곳. 누각이 이 산속에 붙여 있다네.
문을 열면 강물이 들어오고요. 바윗돌 곁에 닿아 서로 의지해 (중략)
맑은 물은 천액(天液)이 흘러내리고 환한 꽃 저녘 비에 윤기가 난다.
아련히 선 곳까지 둘러보다가 눈길 돌려 향그런 초목 대하네.
비탈 골짝 저물녘 서로 합하고 구름 노을 저멀리 살짝 나누나.
즐거움에 오히려 나 홀로 서서 한 밤 더 자며 아니 돌아가고파."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문집 제1권에서 '수종사에서 잠을 자며'라는 시를 통해 운길산과 수종사를 표현했다.
↑ 수종사 삼정헌에서도 ‘두물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운길산은 수종사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낙향한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을 때면 언제나 수종사에서 차를 함께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지듯이 운길산 수종사는 차향의 산실로 유명하다.
운길산에서 철문봉∼예봉산에 이르는 능선을 '다산 능선'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는 다산의 생가와 묘가 있다.
수종사의 주무 보살 장희영(28)씨는 "세조가 금강산을 다녀오다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새벽에 이상한 종소리가 들려 잠을 깨 부근을 조사하게 하자 바위굴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 나왔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水鐘)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당시 심었다는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도 수종사가 '고찰'임을 입증한다.
나무둘레가 7m, 높이는 40여m나 된다. 양평군 용문사 은행나무보다 수령이나 키는 작지만 모양새는 더 운치가 있다.
수종사 안에는 두물머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조선 선종 때 서거정이 "동방절기 가운데 이만한 전망을 가진 절이 없다"고 칭송했을 만큼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는 압권이다.
수종사에서는 2003년부터 대웅전 앞에 '삼정헌'이라는 다실을 마련, 신도들과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차 공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운길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늘어나면서 '통제 아닌 통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장 보살의 설명이자 부탁이다.
장 보살은 "많은 분들이 산행 후 절을 찾는데, 개중에는 음주를 했거나 복장이 너무 난해(?)한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다실 분위기를 위해 지난해부터는 등산복 차림의 손님들은 삼정헌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요. 시간도 평일에는 낮 12시에서 오후 4시까지, 주말에는 오후 5시반까지만 개방하고 있고요"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등산객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종사 입구와 절 안에 맛있는 약수터가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 준다.
수도권 등산 동호회의 산행일지는 지하철과 전철 노선의 확장에 따라 변한다. 개별 산행과 가족 산행을 고집하는 동호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권 전철 중앙선'의 단계적 연장이다. 중앙선은 2005년 말 서울 용산역에서 경기 남양주시 덕소역까지 복선화한 데 이어 2007년 말 팔당역까지 연장개통되면서 주변 명산을 찾는 등산객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중앙선의 팔당역 개통으로 '산꾼'은 물론 일반 동호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선 곳이 '예봉산'이다. 그리고 다시 2008년 말 남양주시 조안면의 '운길산'이 아예 산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하면서 일대의 '산행지도'를 또 바꿔놓았다. 중앙선은 특히 주말에는 '등산열차'라 할 만큼 등산객들로 붐빈다. 주변 상권에도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팔당역 인근 예봉산 입구는 2008년부터 음식점이 늘고, 등산전문점도 들어섰을 정도다. 2009년부터는 운길산역과 국수역 주변에 가게가 늘고 있다.
↑ 한 여성 등산 동호인이 7일 오후 예봉산 견우봉에 올라 만세를 부르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면의 예봉산 견우봉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양주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운길산 수종사 가는 길에는 농산물 좌판이 즐비하다. 2009년 12월 중앙선 전철이 경기 양평군 용문면까지 또다시 연장되자 인근의 '용문산'과 '백운봉'까지 수도권 등산 동호인들의 '번개산행'코스가 됐다. 그러나 산의 특성 때문인지 '용문역'을 이용하는 산행은 '반짝'이었다는 것이 등산 동호인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용문역'까지의 연장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등산인, 특히 주말산행인들은 여전히 '예봉'과 '운길'을 선호하고 있다.
2년여 전 서울생활을 접고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로 귀향(?), 운길산역 인근에서 음식점을 하며 예봉산·운길산을 매주 오르내린다는 홍성학(47)씨는 "지난해 중앙선이 용문역까지 개통되면서 잠깐 운길산을 찾는 등산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올해 들어 다시 2009년 수준으로 늘어난 것 같다"면서 "요즈음에는 예전과 달리 젊은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특히 운길~적합~예봉으로 이어지는 종주 산행을 하는 등산 마니아들이 운길산과 예봉산을 즐겨 찾는 것 같다"고 일대의 산행 추이를 설명했다. 그는 또 "용문역까지의 연장 개통 직후 용문산으로 동호인들이 몰리기도 했지만 두물머리와 남·북한강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예봉산과 운길산의 풍광 때문인지 주말 중앙선 등산객들의 70~80%는 팔당역과 운길산역을 이용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과 와부읍에 걸쳐 있는 운길산(610m)과 예봉산(683m)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내려다보면서 솟아있는 산이다.
뾰족하게 두물머리로 뻗친 능내리를 사이에 두고 두 산이 마주하고 있다. 최근의 추세인 '종주 산행'을 나서는 사람들은 운길산역을 통해 운길산~적갑산(570m)을 거쳐 예봉산을 오른 뒤 팔당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기자는 예전에 중앙선이 개통되기 전에 '산꾼들'이 타곤 했던 팔당역에서 곧바로 예봉산에 올라 적갑산~오거리~운길산~수종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선택했다.
이 코스는 산행 초반이 힘겹기 때문에 '속공'과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마니아들이 택하는 코스다. 마니아 흉내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기자가 이 코스를 선택한 것은 산행의 마무리를 '수종사'에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봉산 일대는 서울시내에서 전철로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산이 깊다. 도시의 번거로움이 절로 사라진다.
팔당역에서 곧바로 예봉산으로 오를 때는 숨이 턱턱 찰 정도다. 최근 전철이 개통되면서 남양주시에서 가파르고 위험한 구간을 나무 계단으로 정비했는데 '자연미'가 없어진 느낌이다.
소나무가 즐비한 숲길로 접어들자 청명한 산새소리가 들려온다. 한번 휴식하고 정상까지 바로 오르니 1시간20여분. 예봉산 정상에 서면 한강 두물머리와 운길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빈산(禮賓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옛적에는 이 산에 아름드리 나무가 많아 조선시대의 정부관서 중 손님을 맡아보던 관아인 예빈시에 나무벌채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빈산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한강을 굽어보는 전망대에서는 안개 속을 헤집어 발아래 팔당대교를 내려다보며 여유를 가져본다. 마주 보이는 검단산은 여전히 구름에 갇혀서 정상을 구분키 어렵다가 잠깐 얼굴을 비친 후 아쉬움을 남기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곧바로 서북쪽으로 보이는 적합산으로 향했다. 예봉~적합능선을 탈 때면 '명상'에 젖어들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다. 숲이 우거져 낮에도 어두울 정도. 적갑산을 지나 오른편으로 굽은 길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 끝에 오거리가 나온다. 운길산까지의 종주가 부담스러운 경우 오른편의 마을로 내려가면 된다. 쉼 없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먼발치의 운길산이 조금씩 가까워오면서 바윗길이 나타나고 이어 운길산 정상에 서게 된다. 수종사 방면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한데 섞여 전 구간 중에 가장 번잡스럽다.
다음은 수직하강 하듯 수종사로 향하면 된다. 종주에는 중간에 세 차례의 짧은 휴식을 포함해 5시간30분쯤 걸렸다. 코스 전반이 정비가 잘돼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과 쉼터도 조성이 잘 돼 있어 한눈만 팔지 않는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종주를 마칠 수 있다. 13㎞ 안팎의 예봉~적갑~운길의 종주길은 수도권에서는 귀한 육산(肉山·산의 돌과 바위를 사람 뼈에 비유하고, 산의 흙은 사람 살과 같다는 산악인들의 해석)이다. 운길산 정상 양쪽에 약간 돌산의 형세가 있지만 그밖의 대부분 능선은 흙산이다. 그래서 무릎에도 부담을 주지 않아 '어르신' 동호인들도 도전이 가능한 종주 코스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터를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금강산의 봉우리였던 '수락'과 '불암'이 한양의 남산이 되고자 한걸음에 달려왔으나 '산 같지도 않은' 산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둘은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 그 자리에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수락산과 불암산에 얽힌 전설이다.
조선조에는 수락산의 산세가 한양을 등지고 앉은 형국이어서 '반역산'으로 보았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참살하자 김시습이 세상을 등지고 숨어든 데도 수락산이었다.
↑ 암벽동호회 ‘APEX’ 회원들이 지난 1일 오후 수락산 ‘하강바위’에서 암벽등반을 하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그래서인지 수락산은 서울의 북한산이나 도봉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와중에 전국 100대 명산에도 못드는 푸대접을 받았다. 지금이야 수락산의 서울 쪽인 마들 들녘에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차 그나마 주민들의 대접을 받고 있지만. '반역산' 운운하는 데 대해 허튼소리라는 비판도 있다. 수락산과 불암산의 주변에 동구릉, 태릉 등 왕가의 무덤이 많은 것이 그 반증이라는 것이다. 원래 '수락(水落)'으로 산의 동편자락 금류동 계곡에 폭포가 많아 그리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 명물 바위순례
수락산은 규모는 작지만 계곡길과 다양한 능선, 암반을 고루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산이다. '명물'이라고 할 만큼 재미있는 바위들이 많다. 수락산은 장암역과 수락산역, 마들역, 상계역, 당고개역 등을 통해 오를 수 있어 서울에서 가장 접근성이 편한 산이다. '명물 바위순례'를 하자면 수락산역에서 내려 수락골관리사무소∼새광장∼깔딱고개∼철모바위를 거쳐 정상을 둘러본 뒤 도솔봉까지 거치는 코스가 가장 제격이다. 1일 수락산을 찾았을 때도 이 코스를 택했다.
신선교를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오른쪽으로 만나는 바위가 물개바위다. 삐죽하게 생긴 물개다. 계곡이 끝날 즈음에 깔딱고개가 나온다. 어느 산이나 같은 이름의 고개가 있지만 수락산 깔딱고개는 만만치 않다. 특히 독수리바위 암반은 철로프가 설치돼 있지만 상당히 가파르다. 겨울에는 눈이라도 쌓여있으면 다른 길을 택하는 게 좋다. 독수리 암장 꼭대기에 독수리바위가 있다. 자주 올랐어도 어느 바위를 독수리바위로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꼭대기에 손가락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이곳이 마들 들녘을 비롯해 서울시내 전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지다. 왼쪽으로 불암산, 오른쪽으로 사패-도봉-삼각산이 빙 둘러쳐진 서울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좀 더 가파르게 계단길을 오르면 오른편으로 마치 거대한 배낭 모양의 배낭바위를 만난다. 그 너머에서 보면 배낭바위 옆에 미륵바위가 나란히 있다.
철모바위까지 오르면 정상능선에 오른 것이다. 주봉 옆 철모바위는 꼭 철모를 뒤집어 놓은 형상이다. 수락산 주변은 6·25 때 격전지였다.
주변에 탱크바위도 있는데 그런 역사의 아픔과 관련지어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철모바위 옆에는 예나 지금이나 막걸리를 파는 노점이 있다. 여기쯤 숨가쁘게 오르면 입안이 바짝 마르기 마련이어서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주인장은 하산을 위해 취할 정도로 술을 팔진 않는다.
정상 반대편 능선길로 내려오다 보면 코끼리바위와 유명한 암벽등반 코스인 하강바위를 만나고 이어 치마바위를 지나 도솔봉에 이르게 된다. 도솔봉 조금 못미쳐서 지나온 치마바위 쪽을 돌아보면 수락산에서 놓칠 수 없는 '비너스바위'(위 사진)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여성바위'라고도 부르는데 가서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보통 도솔봉 못미처에는 처음 만난 등산객들이 비너스바위를 바라보면서 '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다.
◆ 수락산 역사 순례
장암역에서 바로 오르는 석림사 계곡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살라 버린 후 숨어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은 김시습의 뜻을 이어 이곳에 청절사를 짓고 실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다. 박세당 고택이 지금도 남아 관리되고 있다. 원래는 큰 저택이었으나 6·25때 소실돼 사랑채만 남아있다.
또 벽운동계곡으로도 불리는 수락골에는 조선 영조 때 노론의 영수였으며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1713~1778)이 지은 우우당(友于堂)이 남아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에 깊이 관여된 인물이다.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덕릉고개에는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의정부 별내면 쪽에서 오르다 만나는 내원암은 정조의 왕세자인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기도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도솔봉 아래의 용굴암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가 여주 지방으로 피신하면서 이곳에 들러 치성을 드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순 넘어 암벽등반을 시작해 인생을 다시 사는 느낌이에요."
지난 1일 수락산을 등반하며 하강바위에서 자일을 타는 5명의 남녀와 마주쳤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오버행'(돌출된 바위)의 하강바위를 탈 정도이니 모두 '쌩쌩해' 보였지만 '연세'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여쭈어 보니 모두 60세 이상이다. '헐∼'소리가 절로 난다. 장비를 꾸리고 있었지만 사진을 위해 다시 한번 오버행 하강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짐을 풀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 암벽동호회 ‘APEX’회원들이 ‘하강바위’아래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낙중기자
60대로 구성된 남녀 암벽동호회인 'APEX산악회' 회원들이다. 산악회 대장 강경선(62·서울 구로구 개봉동)씨는 근 30년 동안 등산을 해온 전문가급 수준. 코레일에 근무하면서 일부러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업무를 자청해 쉴 때마다 등산을 다녔고 전국에 안 가본 산이 드물 정도란다. 자연스럽게 암벽에도 관심이 갔다.
"2005년 산악회를 만들면서 마침 부산에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는데 그 이름을 따 'APEX'로 이름을 지었어요. '정상'이나 '꼭짓점'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산악회 이름으로 정했지요."
당시에는 50대가 주축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60대가 됐다. 처음에는 일반 산행을 주로 했으나 점점 암벽등반에도 관심을 갖게 돼 장비를 갖추고 수락산을 비롯해 북한산 인수봉, 도봉산 오봉 등을 주로 다닌다.
"여성 회원들이 처음엔 암벽등반을 겁내지만 한 번 해보면 남자들보다 더 좋아해요. 요즘엔 장비가 잘 만들어져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날 수락산 산행도 오버행 하강에 자신감이 없는 현병려(여·65·오른쪽 끝) 회원의 지도를 위해 찾은 것이란다. 암벽은 배운 지 1년 정도 됐다는 현씨는 "발이 닿을 때는 괜찮은데 오버행에서 발이 떨어지면 겁이 나 자세가 흐트러지게 된다"며 "오늘 자신감을 얻었다"며 활짝 웃는다. 현씨는 "골프나 테니스도 해보았지만 60이 넘어 시작한 암벽이 최고"라면서 "한껏 스릴을 느끼고 나면 나이가 어려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신경준이 쓴, 한반도 산줄기들의 분수계를 정한 '산경표'에는 도봉산을 이렇게 적고 있다."백두산의 북에서 내려오다 강원도 평강에서 서남쪽으로 꺾여 한북정맥을 형성하면서(…) 의정부 남쪽에서 도봉산을 일으키고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만들었다…."그렇다면 도봉산은 삼각산(북한산)의 형님뻘인 셈이다. 도봉(道峯)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아마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그 이름대로 도봉산은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삼각산의 위용에 가려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서 있을 뿐 조명을 받지 못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서울·수도권 북부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도봉산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산이다.도봉산은 삼각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둘레길의 삼각산 구간이 완공된 데 이어 도봉산 구간이 6월 말 개통을 앞두고 있다. 이 산을 속속들이 보살피고 있는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사무소 관계자들과 지난 18일 개통을 앞둔 도봉산 둘레길을 돌아보았다.
↑ 도봉산 신선대가 바라보이는 도봉동의 둘레길.
↑ 공식 공개에 앞서 한 등산객이 도봉산 둘레길 5구간의 제2보루에 앉아 의정부 시내를 둘러보고 있다. 시내 뒤편에 펼쳐진 산이 수락산과 불암산. 의정부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시작으로 한국의 레저문화는 둘레길 걷기가 화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난해 8월 북한산 둘레길 13개 코스를 완공한 데 이어 나머지 도봉산 구간 8개 코스가 6월23일(예정) 개통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완공된 북한산 구간은 총 44㎞였으니 도봉 구간 26㎞가 더해지게 되면 총 연장 70㎞의 도심 속 워킹코스가 생겨난다. 아마 이 구간을 쉬지 않고 완주하려는 '마니아층'이 곧 나타나 시간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총 33억원의 예산이 들어간 도봉둘레길 구간은 북한산 구간에 비해 높낮이의 폭이 더 크고 동네로부터 다소 떨어진 한적한 코스가 많다. 서울 도봉구와 의정부시, 양주시를 지나게 되며 구간 특징별로 8개로 나누었다. 지난 18일 도봉사무소 탐방시설과 문명근 과장과 이재규 대리, 공단 공원시설부 윤대원 차장이 도봉구간 일주에 동행했다.
◆ 1구간 : 왕실묘역길(연산군묘~정의공주묘) = 첫 들입목은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다. 지하철 7호선 노원역이나 4호선 수유역에서 우이동 입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이 구간에서는 연산군묘(사진)와 정의공주(貞懿公主)묘를 만나게 된다. 원래 '능원길'로 명명하려 했으나 연산군(1476~1506)이 폐위된 왕이어서 능(陵)을 붙이지 못하고 왕실묘역길로 정했다. 연산군묘는 1991년에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됐고 일반에 공개된 것은 몇년 되지 않는다.
지금도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묘역이다. 부근에는 연산군 재실(齋室)이 있는데 묘와 재실 모두 연산군의 사위들이 관리해 왔다고 전한다. 연산군묘 바로 옆에는 600여년 전 파평 윤씨가 자리 잡은 원당마을과 원당샘이 있으며,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볼 만하다. 가까운 거리에는 조선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와 부군 안맹담의 묘역이 있다.(1.7㎞, 40분)
◆ 2구간 : 방학동길(~무수골) = 8개 코스 중 가장 편한 코스다. 경사가 완만하고 호젓한 숲길이 가족과 함께 걷기에 그만이다. 특히 이 코스에는 7m 높이의 전망대가 만들어진다. 도봉산의 주봉능선과 서울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등정코스 중 사람들에게 가장 덜 알려진 들입목이다. 근심걱정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무수골(無愁谷)인데, 옛적에 대장간이 많아 무쇠골에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3.4㎞, 1시간20분)
◆ 3구간 : 도봉옛길(~다락원) = 1호선과 7호선의 도봉산역이 지나는 도봉산 입구가 포함된 코스다. 도봉옛길은 옛적에 도봉에서 방학동으로 이동할 때 쓰였던 길에서 유래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고려시대 철불좌상이 있는 도봉사와 우암 송시열 '도봉동문(道峯洞門)'이란 암각이 있는 도봉서원을 지난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덱이 이 코스에 설치된다.(2.8㎞, 1시간)
◆ 4구간 : 다락원길(~원도봉) = 이 구간부터 의정부시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에 있던 다락원은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원(院)이 있었는데 그 집이 다락으로 되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지금은 다락원캠프장이 있으며 수도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군사시설이 많으며 미군부대도 있다.(3.0㎞, 1시간)
◆ 5구간 : 보루길(~회룡사) = 삼국시대에도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모양이다. 고구려가 만든 보루(堡壘)가 세 군데 있다. 제1, 2보루는 멀리서 볼 수 있고 3보루는 오를 수 있다. 멀리 의정부시가 한눈에 들어와 조망이 좋다.
의정부시 호원동에 있는 1호선 회룡역에서 바로 오를 수 있다. 이곳의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에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와 이곳에서 수도하던 친구인 자초를 찾아오자 자초는 '회란용가(回鸞龍駕)'라 하면서 기뻐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호선 회룡역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다.(2.8㎞, 1시간)
◆ 6구간 : 안골길 = 의정부시에서 이미 조성한 직동공원을 이용하도록 설계돼 잘 꾸며진 도심공원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북한산국립공원 내 안골마을로 이어진다. 안골계곡으로 물길이 좋아 지친 발을 담그고 쉴 수 있는 코스다.(3.5㎞, 1시간20분)
◆ 7구간 : 산너머길 = 지형적 여건상 산의 6부 능선 정도를 상당 구간 등산해야 하는 코스로 전망은 가장 좋지만 난도가 도봉산 둘레길 중 가장 높다. 하지만 계곡을 끼고 탐방하는 구간이 있어 탐방객들의 호응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3.8㎞, 1시간40분)
◆ 8구간 : 송추마을길 = 역시 군사시설이 많아 기존 마을의 길을 주로 지나야 한다. 아직 덜 도시화된 마을을 통과하며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교현리 우이령 입구까지 이어진다.(5.0㎞, 1시간50분)
도봉산 입구에서 30년 넘게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점을 운영해온 박노윤(62·사진)씨. 현재는 손두부전문집을 운영하며 이 지역 상가번영회 회장인 박씨는 "원래 도봉계곡 위까지 노점들이 난립해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말에 지금 모습대로 재개발이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당시 노점상들에게 상가를 분양했지만 등기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고 팔고 나간 사람도 많다는 것.
그러다가 외환위기 때 한차례 변화를 겪었다.
"장사가 어렵다 싶을 즈음에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은 남자들이 산으로 몰려오더군요. 처음엔 누군가 했지. 점심에 빈대떡에 막걸리 한 병을 시켜먹고는 종일 빈둥대다가 저녁이면 '퇴근'하듯이 빠져나가더군요.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출근한다고 나와 갈 곳이 없어 몰려든거지. 서울은 물론이고 멀리 인천이나 수원에서도 많이 왔어요."
그 덕분에 장사는 활성화됐다고 한다.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은 건 2007년 국립공원 무료입장이 전면화된 이후다.
"갑자기 까만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몰려들더라고. 처음엔 전문 등산인들인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고. 등산객이 늘어나면서 처음 유행한 등산복이 전부 까만색이었어요. 그러다가 경기가 풀리면서 등산복도 형형색색으로 다양해졌지요. 등산복으로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 알겠더라고. 한벌에 수십만원씩 하는 등산복을 갖춘 사람들을 가만 보면 산정상에는 오르지도 않는 것 같아. 허허."
등산객이 찾는 술은 예나 지금이나 막걸리.
"땀 흘리고 막걸리가 제격이죠. 이전에는 싸고 기름진 안주를 찾았는데, 웰빙바람으로 요즈음 두부 안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수천만대를 거쳐 노원을 안고 지켜온/큰 웅지의 품을 넘보아가며/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았습니다./용서하십시오."
불암산(508m)은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과 같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불암산은 그 규모에 비해 불암사 학도암 등 등 여러 사찰과 암자를 품고 있다. 불암산이 예전엔 필암산(筆岩山)과 천보산(天寶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필암산은 억불(抑佛)을 했던 조선시대에 고쳐 불렀던 이름이고, 천보산은 도교와 관련된 지명이다. 불암산은 유·불·선이 고루 연관된 영성적인 산이다.불암산처럼 접근성이 좋은 근교산도 드물다. 지하철 당고개역, 상계역 등에서 편하게 갈 수 있다. 찾는 사람이 많다보니 불암산은 서울·수도권 주민들에게 아주 '익숙한' 산이다. 어느 코스를 타든 3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는 크지 않은 산이어서 인근 주민이 아니면 서너 번 찾고는 그만두는 것 같다. 하지만 불암산의 참맛을 모르는 탓이다.이름에 바위 암(岩)자가 들어 있는 불암산은 거대한 암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불암산을 아주 새롭게 볼 수 있는 방법, 바로 리지산행이다. 해본 이들은 "이렇게 좋은 산이었나?"하고 스스로 깜짝 놀란단다.
↑ 불암산 영신바위에서는 서울 노원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다. 18일 암벽등반 전문가인 정대일(가운데)씨와 등반객이 영신바위를 오르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불암산은 오밀조밀한 바위가 매력적이면서도 암벽 코스가 많고 다양해 암벽등반을 배우기가 가장 좋은 산입니다. 암벽등반의 기초를 불암산에서 배우고 북한산 인수봉에서 마무리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실제 불암산에는 노원구 중계본동 영신여고 뒤 영신바위부터 학도암 암장, 정상 부근 102암장, 하마등바위, 백바위, 당고개 불암산 넓은 마당 초소 위의 119바위, 동인암장 등 암장코스가 수두룩하다.
특히 평평하고 넓은 바위인 슬래브(slab)가 잘 발달해 리지등반의 명소로 꼽힌다. 자일을 타는 본격 암벽등반은 등산학교 등을 통해 전문적으로 교육을 이수한 뒤 할 수 있지만 리지화에만 의존하는 리지등반은 지도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수월하게 배울 수 있다.
상계역 부근 불암산공원의 오른쪽으로 불암산 둘레길을 20여분 가다보면 영신바위가 나타난다. 멀리서만 보던 영신바위인데 막상 바위 하단에 서니 더 압도되는 기분이다. 초보자의 눈에는 거의 70∼80도는 돼 보이는 경사다. 하지만 아직 영신바위의 위용은 더 올라야 볼 수 있다.
"영신바위뿐만 아니라 어떤 슬래브도 길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에요. 아주 쉬운 코스를 타고 '영신바위 다녀왔다'고 하면 좀 우습죠. 하지만 처음에는 익숙한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하는 게 안전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발끝으로 타는 것이다. 보통 초보자는 미끄러질까 두려워 허리를 굽히고 엉거주춤 손을 바위에 대기 마련이다. "앞으로 엎어지면 무게중심이 뒤로 빠져서 미끄러질 우려가 더 커지지요. 허리를 곧게 세워야 바위에 수직으로 무게중심이 쏠려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시키는대로 해보지만 역시 두려움에 허리가 굽어진다. 하지만 천천히 오르다보니 허리를 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 것 같다. "낙엽이나 풀은 절대 밟지 말아야 합니다. 또 슬래브에 나무가 있다 해서 거기에 체중을 모두 의지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어요. 나무는 조금만 보조적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드디어 영신바위 상단에 도착했다. 진땀으로 속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100m는 족히 될 듯한 슬래브를 돌아보니 아찔하다. 아! 그러나 거기서 익숙한 불암산이 아니라 새로운 불암산이 보였다. 거대한 슬래브 위에 서니 시야에 거칠 것이 없다.
그곳에서 만난 중년여성 강혜영, 송주원씨는 집이 노원구 중계동이어서 매일 영신바위를 리지하는 마니아다. 영신바위를 타고 헬기장까지 갔다 하산하는 데 2시간이 걸리는데 아침 8시에 오른다고 한다. 노련함이 느껴진다.
강씨는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나던 바위도 한번 타보면 그 다음부터는 무서움이 극복돼요. 하지만 낯선 바위를 만나면 다시 무서워지지요. 마치 인생사 같다"고 리지의 매력을 말했다. 송씨는 "바위를 타면 만나게 되는 탁 트인 조망이 너무 좋아 그냥 일반 산행은 재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쫄바지' 정씨는 "바위를 많이 타면 바위의 기(氣)를 받아 건강해진다"면서 "불암산 아래의 관공서에도 불암산의 기를 받아 진급해 나가는 공무원이 많다"고 너스레를 피운다. 믿거나 말거나다.
◈ 불암산에서 '심봤다' = 불암산은 고슴도치나 반딧불이가 나타날 정도로 식생이 좋아졌다. 불암산 부근은 미세먼지 농도가 서울시에서 가장 낮다. 그런데 등산객들에 따르면 얼마전 이 산에서 '산삼'을 캤다는 사람이 나왔다. 노원구청은 2008년 장뇌산삼 종자 5㎏을 불암산과 수락산에 파종했다. 물론 파종장소는 구청관계자들만 알고 있다.
2007년 북한산 등 국립공원의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등산객들이 그쪽으로 몰릴까봐 구청이 '작전'을 쓴 것이다. 그때부터 3∼4년이면 장뇌삼이긴 하지만 먹을 만한 산삼을 캘 수 있다고 했었다. 최근에 장뇌삼을 캤다는 사람이 나오면서 등반객들 사이에 '산삼찾기'가 한창이다.
'남아선호'가 강했던 옛적엔 어디서나 '남근석' 숭배가 있었다. 관악산에도 숨어있는 남근석들이 많은데, 특히 여성 등반객들이 많이 찾는다. 사당능선을 오르다 낙성대 갈림길 전에 이정표에 연주대 2.4㎞, 사당역 2.6㎞라고 쓰여있는 지점이 파이프능선 갈림길이다.
파이프능선길로 내려서서 10분쯤 지나 계곡을 건너면 왼쪽에 너른 바위가 나오고 오른쪽 길목에 높이 2m가 넘는 남근석(사진)이 나온다. 관악산의 대표적 남근석으로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아 반질반질하다. 그 건너에 치마바위가 있어 대비된다.
유명한 풍수서인 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삼각산(북한산) 남쪽의 관악산을 '화덕(火德)의 산'으로 적고 있다.
↑ 깃대봉에서 바라본 관악산 전경이 연초록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지난 9일 ‘11국기봉 순례’를 하는 젊은이들이 잠시 땀방울을 식히며 ‘야호’를 외치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서울의 맹주인 삼각산을 넘보기는 어렵더라도, 강남의 맹주는 누가 뭐래도 관악산이다. 관악산을 오르는 연간 이용객을 7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으니 가히 국가의 건강보험 비용을 상당 부분 낮춰주고 있는 고마운 산이다. 불기운으로 눈총을 받던 관악산은 이 땅의 수재들이 모이는 서울대를 품고 있고 그 너머로 '나라 경영'을 책임지는 정부 중앙청사를 보듬고 있으니 그 '화기'가 이 땅에 이롭게 쓰이고 있다 할까?
'악(岳)'자가 붙은 산이 그렇듯 관악산에도 높이에 비해 기암괴석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다. 연주대로 대표되는 주능선을 비롯해 팔봉능선, 육봉능선 등 산줄기는 모두 바위가 불꽃처럼 피어올라와 있다.
뭉뚱그려 관악산으로 부르지만 서울대~안양유원지 구간의 긴 계곡을 사이에 두고 관악산 주능선과 마주보고 있는 삼성산(三聖山·481m)은 원효, 의상, 유필이 이 산중에서 일막, 이막, 삼막 등의 '세 암자(삼막)'를 지어 수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산이다.
근래엔 관악산도 변화하고 있다. 관악산 둘레길이 조성돼 시민들이 보다 편하게 산에 접근할 수 있게 됐고 정상에 있던 기상관측소도 개방돼 새로운 볼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관악산 지킴이'와 동행… 이 코스 가보세요
관악산은 서울·수도권 주민들이 '너무 잘' 아는 산이다.
하지만 관악산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관악산 숲가꿈이로 활동하는 김명구(61) '관악산지킴이' 카페(cafe.naver.com/abcwxyz) 회장이다.
석유화학 계통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후 관악산 지킴이로 나선 김 회장은 그동안 관악산을 1000회 정도 올랐다. 관악산 부근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그는 단체나 모임들이 관악산 안내를 관악구청에 요청해오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관악산 둘레길 조성 과정에도 자문역으로 참여했다.
김 회장은 "관악산은 높이에 비해 험하고 많은 계곡과 바위를 품고 있어 어떤 코스를 택하는가에 따라 매번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면서 "초보자의 경우 서울대나 안양유원지 쪽의 편한 코스를, 등산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며 정상인 연주대에서 삼성산까지의 종주도 해볼 만하다"고 권했다. 다음은 김 회장의 추천코스.
◆관악산 둘레길
관악구에서 2009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관악산 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시작해 관음사~낙성대공원~돌산~삼성산 성지~난우공원~신림공원으로 이어지는 15㎞의 길이다. 최근 완공됐고 5월말이나 6월초 정식 개통식을 할 예정이다.
코스는 관악산 숲가꿈이들과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 개발했다. 사당역 까치산 생태육교에서 서울대까지 이어지는 제1구간은 총 6.2㎞로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 장군의 영정을 모신 낙성대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
2구간은 관악산공원에서 출발해 돌산과 삼성산 성지를 거쳐 산정약수터에 이르는 4.7㎞로, 초입은 돌산으로 가파르게 시작하지만 서울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제3구간은 4.1㎞의 숲길로 조용하고 편안한 코스다. 관악산 자락 전체를 순환할 수 있는 약 37㎞에 달하는 '관악산 순환형 둘레길'도 2012년까지 정비될 예정이다.
◆사당-8봉능선
관악산의 기기묘묘한 '바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코스다. 사당역에서 출발하는 사당능선은 약 7㎞에 달하는 관악산에서 가장 긴 능선으로 바로 정상인 연주봉으로 이어진다. 바위능선이라 부를 정도로 암반 위를 걷는 코스가 많다.
정상을 둘러보고 677년(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연주암을 꼭 둘러봐야 한다. 8개의 봉우리가 이어지는 팔봉능선은 왕관바위, 지네바위 등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을 모은 종합세트라고 할 수 있다.
◆관악·삼성산 11국기봉 순례
긴 산행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관악·삼성산 11국기봉 순례에 도전해볼 만하다. 총 연장 27㎞에 달하며 살 빼는 데는 탁월한 코스여서 일명 'S라인 코스'로도 불린다.
사당에서 출발해 관음사 위 국기봉 - 낙타바위 국기봉 - 자운봉 국기봉 - 학바위능선 국기봉 - 팔봉 국기봉 - 육봉 국기봉 - 상불암 위 국기봉 - 깃대봉 국기봉 - 민주동산 국기봉 - 칼바위 국기봉 - 옥문 국기봉을 거친 뒤 서울대 쪽으로 하산하게 된다. 마니아들 사이에 3시간45분대에 주파한 기록이 전설처럼 전해오지만 일반적으로 10시간 이상 넉넉히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