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뛰어 찾은 숨은 맛집(4)
이건 크림파스타가 아닙니다. 콩국수예요!"
농민과 서민의 여름철 보양식이었던 콩국수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이 무어는 맛이 없을까마는 날이 더워지면서 부쩍 어린 시절의 콩국수 생각이 간절하다. 우리 집 맷돌은 평소 건넌방 툇마루 밑 주춧돌 옆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모로 세워져있었다. 집안에 큰일이 있거나 명절 때가 아니면 언제나 그렇게 제 자리에 정물로 존재했다. 여름철에 맷돌이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신명나게 돌아갈 때는 콩국수를 할 때가 유일하였다. 아주 어려서는 사실 콩국수가 싫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여름방학 때, 부모님을 도와 밭에서 땀을 흘리고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콩국수를 먹었는데 그 시원함과 고소함은 비할 바가 없었다. 더위와 노동으로 늘어졌던 몸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던 기억이 있다.
콩은 최고의 건강식품이다. 콩은 단백질과 지방 탄수화물뿐 아니라 비타민 무기질 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성 생리활성 물질들이 들어있다. 기가 쇠하기 쉬운 여름철, 콩국은 몸에 좋은 영양소가 풍부하면서 구하기 쉽고 값이 싸 조선시대 말기부터 농가에서나 서민의 원기회복용 절식으로 많이 애용되어왔다.
수은주가 기지개를 펴고 수목에 녹음이 짙어지면 그에 비례해서 거리에는 반팔 차림새의 멋쟁이가 늘어난다. 그러다가 식당가에 ‘콩국수 개시’라는 글자가 나붙으면 그때부터 진짜 여름이다. 냉면과 함께 여름을 열어젖히는 음식이 바로 콩국수다. 그런데 비 오는 날 우산 장수 나타나듯 여름철만 되면 너나없이 식당마다 콩국수를 팔다보니 정작 괜찮은 콩국수 골라먹기가 의외로 어렵다. 강신교 씨가 운영하는 서울 방배동의 <일미옥 逸味屋>은 이제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식당이지만 진한 콩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며 예전 콩국수 맛을 내는 보기 드문 곳이다. ‘천하일미’에서 따왔다는 옥호처럼 콩국수 맛이 평범하지는 않다.
국산 백태와 쥐눈이콩으로 진하게 갈아내
우선 이 집에서 쓰는 원료가 100% 국산 콩이다. 그것도 백태와 쥐눈이콩 상품으로 두 가지만 골라서 매입한다. 사들인 콩은 먼저 벌레 먹거나 작고 못생긴 ‘불량 콩’을 세밀하게 골라낸다. 콩의 깊은 제 맛을 내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선별작업을 통과한 우량 콩을 10시간 불렸다가 삶아서 뜸을 들인 뒤 냉각시킨다. 콩을 불리는 과정에서는 3시간씩 세 번 정수 물로 해감 시킨다. 날콩에 들어있는 독소성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냉장고에서 차게 냉각시킨 콩을 맷돌기계에 넣고 간다. 김을 두 번 구우면 더 맛있듯, 콩도 두 번을 갈아야 입자가 곱고 목넘김이 부드럽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집과 달리 맷돌에 콩이 갈려 내려갈 만큼만 물을 최소한의 양만 넣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맷돌을 돌릴 때에도 맷돌 가운데 홈에 국자로 물을 연신 부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맷돌보다 이 집 맷돌에 들어가는 물의 양이 훨씬 더 적어 보인다. 갈려나오는 콩국물이 무척 되직하다. 갈기 전에 콩과 함께 소량의 잣도 넣는다. 먹을 때 고소한 콩 맛과 북돋워주는 은은한 잣 향은 나쁘지 않다.
간 콩에는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 보통 다른 집에서는 손님이 직접 자신의 입맛에 맞춰 소금을 넣는다. 그러나 이 때 콩국물에 소금이 잘 희석되지 않아 뒤에 남는 그릇 밑 부분의 국물은 염도가 지나치게 높아 마지막까지 제 맛을 즐길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장 강씨는 웬만한 사람의 입맛에 맞을 정도의 저염도로 간을 한다. 소금을 넣은 국물은 오래 두면 삭기 때문에 당일에만 쓰고 남는 것은 버려야 한다. 식당 측으로서는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균일한 염도의 콩국물을 먹을 수 있고, 만든 지 오래된 신선하지 않은 국물을 먹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콩의 깊은 맛 한 가지에 집중한 메뉴 콘셉트
이 집 콩국수(7,000원)에는 오이채나 찐 계란을 얹지 않는다. 고명을 쓰면 오히려 콩의 진한 맛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이가 청량감을 주기도 하지만 향이 강해 콩의 고소함을 느끼는데 장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국수 모양새가 좀 허전해보여 여기에 식용 꽃을 얹었다. 하얀 바탕에 밝은 빨강이나 노랑은 그 자체로 임팩트가 강하고 보기에도 시원하다. 이런 저런 장식 없는 단순명쾌한 미니멀리즘 작품 같은 콩국수를 먹었더니 몸에 갑자기 힘이 생기는 느낌이 팍 들었다. 올 여름 더위도 덜 탈 것 같은 예감과 함께…
“순수하게 콩국수 맛 이외의 다른 맛은 최대한 자제하였습니다. 콩 본연의 고소함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지요. 그래서 일부러 다른 재료는 넣지 않았습니다. 물도 많이 붓지 않았고요. 아마 저희 콩국물 한 그릇 양이면 다른 집 콩국수 다섯 그릇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주인장 강씨는 콩의 참맛을 살리기 위해 물마저도 억제하였다고 한다. 콩국수를 먹기 위해 젓가락으로 국수 면발을 풀어 국물에 저었다. 그런데 국수가 국물에 풀어지질 않는다. 국물이 국물이 아니라 거의 소스에 가까울 정도로 되직했다. 마치 파스타에 크림소스를 부어놓은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맛을 보았다. 비린내가 가신 고소한 콩맛과 함께 은은한 잣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시원하고 쫄깃한 면발과 함께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먹고 난 뒤에도 입천장과 내벽이 꺼끌꺼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콩가루 입자가 매우 가늘었음이 분명하다.
미리 간을 한 뒤 내와서 그런지 별도로 소금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간이 입에 딱 맞았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간을 맞춰 내어오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직접 소금을 치다보면 소금이 잘 섞이지 않아 싱거웠다 짰다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살짝 후추 가루를 뿌렸더니 이건 영락없는 크림파스타의 맛이다. 아니, 파스타보다 훨씬 맛이 고소하고 풍부했다. 옆에 있는 동료가 ‘이거 혹시 진짜 크림파스타가 아니냐’고 물었다. 먹을 때 국물이 너무 진하다면 김치를 곁들여야 개운하다. 이때 면발에 김치를 얹어서 함께 먹으면 김치 때문에 진정한 콩국의 깊은 맛을 볼 수 없다. 면을 완전히 입 안에서 씹어 삼키고 나서 김치를 먹으라며 주인장 강씨가 제대로 된 콩국수 먹는 법을 거든다.
콩국수 맛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콩국수를 먹기 전에 예전만큼 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맛있는 콩국수를 먹으려면 좋은 콩으로 정성껏 만든 콩국수를 만나는 것 외에, 열심히 일을 해서 몸에 땀을 내야 한다는 점을 요즘 사람들이 몇이나 알고 있을까? 02) 533-719